87년 6월 항쟁 20주년 기념 특집

사진 : 김하영 기자
군홧발에 짓밟히면서도 민주화를 외치는 여학생들이 있었다. 최루탄이 터지는 상황에서도 서로 팔을 부여잡으며 자리를 지켰다. 87년 6월 민주 항쟁이 20주기를 맞아 당시 이화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줄 86년도 총학생회(총학)장 서영교(정외·88년 졸) 대통령 비서실 춘추관장을 지난 24일(목) 청와대에서 만났다.

학관 4층 창문에서 사이렌이 울리며 한 여학생이 ‘학우 여러분’이라고 외쳤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학우의 머리채는 남성의 손에 휘어 잡혔고 학교 밖으로 끌려나갔다.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어 돌을 들고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이것이 서영교씨가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다.   

독재정부 탄압을 거부하며 이화인 4천 명이 모여 ‘수업거부운동’도 진행했다. 대강당을 가득 채운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과별로 촌극·노래경연대회 등을 열었다. 현재 영화감독 변영주(법학·89년 졸)씨는 재미있는 촌극 대본으로 학생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가 총학생회장직을 넘겨받는 날, 그는 이미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했다. 어차피 잡혀갈 거라면 혼자만 잡혀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운동의 진원을 ‘총학생회장이 시킨 것’으로 말하도록 학생들에게 지시했다. 결국 치안본부 수배령이 떨어져 그는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동아리연합회장의 집과 후배 집에 머물며 거처를 옮겨다녔다. 도피생활 2개월 만에 12월 6일 교도소로 연행됐다.

사회적으로는 6월 항쟁을 예고하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던 서울대 박종철씨가 고문에 의해 사망하는 일이 1987년 1월 발생했다. 이와 더불어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 발표에 맞서 국민들은 ‘호헌철폐’ㆍ‘직선제’를 외친다. 이것이 6월 항쟁이 일어나게 되는 과정이다. 이화에서도 1987년 6월 10일 최초로 1만 명의 학생이 모여 집회를 열었다. 당시 우리 학교 집회장소의 확성기 소리가 약하다고 생각한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모금을 했다. 순식간에 1천만원을 모아 성능이 좋은 스피커를 마련했을 정도다.

그는 87년 6월 항쟁을 ‘6월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무력이 아닌 시민의 외침과 단결로 이뤄낸 민주화 항쟁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군부독재 후계자’에게 정권을 내준 것이 한계라고 평가했다. 특히 그는 민주세력이 단결하지 못하는 부분이 최대의 취약점이었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 그때를 돌아봐도 운동하는 것은 ‘행복’했다. 가슴에 늘 죄책감을 가지고 숨어있다가 군부 독재 사회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운동을 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여겼다.

당시에는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던 사회였다. 그래서 기습적으로 준비해 투쟁과 데모를 여는 것만이 민주화를 이야기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서영교씨는 지금 학생들이 꼭 386세대와 같은 삶을 살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민주화를 위해 죽어간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대학생들이 사회의 지성인으로서 이 사회의 좌표 기준 표준이 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그는 취업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펴는 하나의 수단이 되면 훨씬 여유있게 바라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자기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 사회가 어떻게 하면 더 발전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세요”사회에 몸바치고 헌신한 그의 목소리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세상을 향해 메아리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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