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섹스파트너를 두는 것도 나쁘지 않네.”
지석이 침대에 누워서 말했다. 섹스를 마치고 여린 피로가 깃들어 목소리가 나른하게 늘어졌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군살 없이 단련된 몸. 아진은 그간의 시간이 비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잠든 후에 만져보곤 했던 등의 화상자국을 만져 보고 싶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면. 오돌토돌하게 손에 전해오던 그 자국이 거짓말처럼 사라졌을 것만 같았다.
“y한테 얘기 들었어. 너 누드 그린다며?”
지석의 눈길이 아진의 몸을 훑었다.
“대단할 거라고 자랑이 여간이 아니던데.”
지석은 한 번 더 아진을 끌어당겼다. 아진은 가만히 몸을 맡긴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로 된 천장이었다. 한 꺼풀씩 옷을 벗길 때마다 드러나는 아진의 몸에 지석이 키스했다. 어깨에 지석의 입술이 닿았다가 허리에 닿고 다리에 닿았다. 아진의 하얀 팔다리가 감싸고 있는 그의 몸은 검고 탄력 있었다. 그의 곧은 등뼈가 거울에 비쳤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많이 길어 목덜미까지 내려와 있었다. 강한 어깨근육. 엉덩이가 바쁘게 움직였다. 타인의 정사장면을 훔쳐보는 것만 같아 아진은 순간 아찔해졌다. 어깨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근육이 그의 몸에 강한 곡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화상자국. 아직도 선명하게 매끈한 등이 한 부분 구겨진 듯이 일그러져 있었다. 아진은 손으로 그의 등을 잡았다. 오돌토돌한 감촉. 그가 잠시 멈칫했다.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콤플렉스라고 말했었다.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이잖아. 그래서 따로 생각은 안 하지만 누구의 손이라도 등에 닿으면 몸이 움찔해. 같이 목욕을 하다가 지석의 등에 거품을 바르려 만진 아진에게 그가 말했다. 당신에게 그런 것도 있어요? 아진이 물어보자 그는 더 말하지 않고 대충 물을 끼얹고 욕실을 나갔다. 수건을 걸쳐서 등에 흉터는 보이지 않았다.
반듯한 그의 깊숙한 곳에 구겨진 흉터. 그자신도 모르게 감춰놓은 내밀한 상처. 아진은 그런 것들을 그가 내보이길 원했다. 세련되지 못 해도 혹여 초라해질지라도. 그래서 그가 지켜왔던 것들이 무너져도. 아진은 지석이 자신을 붙잡아주길 원했다. 울면서 자신에게 매달리고 사랑을 호소하길 원했다. 확인받고 싶었다. 하지만 지석은 마지막까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또렷한 눈빛과 분명한 말투로 이별을 받아들였다. 깨끗하게. 언제나처럼.
아진은 천장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초라하게 엉켜있었다. 곧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은 원망과 갈구, 후회가 뒤섞여 탁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은 아직도 그에게 사랑을 호소하고 있었다. 형편없다. 아진은 그를 밀쳐냈다.
“너는 여전하구나.”
지석의 갈색눈동자에 흔들림이 비쳤다.
“……”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지석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숙인 채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옷을 하나씩 주워 입었다.
아진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침대 위 딱딱하게 굳어버린 나체가 비쳤다. 옷을 입는 검은 육체를 가진 남자가 비쳤다. 남자의 짧은 한숨소리와 머뭇거림이 비쳤다. 침대에서 일어나 나가는 남자의 침묵이 비쳤다. 거울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문소리가 들렸다. 복도를 걸어 나가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거울에는 고집스레 마음을 잠근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얼굴이 비쳤다.


20.
여자가 준 합의금을 들고 혜은은 백화점에 나섰다. 여자는 차로 태워주겠다며 엘리베이터까지 따라 나왔다. 혜은은 손사래를 치며 여자를 들여보냈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여자의 표정이 보였다. 평일 낮인데도 백화점은 사람으로 붐볐다. 낡은 정장 때문에 직원들이 친절을 보이지 않아 혜은은 마음이 편했다. 유리 안 보석들을 몸을 구부려 꼼꼼히 살폈다. 이 백화점이 맞을 텐데, 혜은은 중얼거렸다. 화려한 보석들 중 같은 디자인을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결혼이 행복한 결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혜은은 마냥 키득대고 있었다. 그가 맨 나비넥타이가 장난스럽게 움직였다.
“신부가 그렇게 헤프게 웃으면 쓰나.”
그가 시장에서 산 하얀 원피스의 소매를 매만져 주었다. 양은대문이 끼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산스럽게 재환이 들어왔다. 어설픈 양복차림이 눈에 설었다. 혜은은 웃음을 터뜨렸다. 재환은 한 손엔 케이크상자를 들고 있었다.
“준비들은 된 거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재환이 혜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혜은도 끄덕여보였다. 작은 방이 셋의 체온으로 가득 찼다. 혜은은 웃음을 참느라 볼에 바람을 넣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재환이 그런 혜은을 제법 침착한 표정으로 흘겨보았다. 재환은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신랑은 평생 신부만을 아끼고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그가 말했다.
“그럼 신부는?”
혜은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자, 이로써 철딱서니 없는 연인이 막무가내로 부부가 되었습니다.”
재환이 그럴싸하게 둘의 어깨를 잡았다. 혜은이 호들갑스럽게 박수를 쳤다. 그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반지였다. 아주 작은 보석이 박힌. 예쁘고 조용한.
“이 큐빅 꼭 진짜 다이아같다.”
재환이 반지를 뺏어들고 눈에 가까이 대고 보면서 말했다. 혜은이 웃었다. 그가 눈을 흘기며 재환에게서 반지를 뺏었다.
“진짜라고. 마련하느라 힘들었어.”
정말이야?, 혜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 결혼선물이잖아. 그가 혜은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왼손 약지에 반지가 작았다.
“뭐야. 작잖아. 혜은아, 그러게 살을 빼라고 했잖아.”
재환이 고소하다는 듯 키득댔다. 하는 수 없이 혜은은 입을 삐죽이며 새끼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그는 혜은의 손가락에 입 맞추었다.
“아냐, 혜은이 너는 통통한 게 예뻐.”
그가 혜은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린 결혼한 거야. 이제 네가 나의 보호자야. 내가 너의 보호자고. 내겐 너뿐이고, 너한테는 나뿐이야.”
혜은은 웃었다. 그 하나면 충분하니까. 그에게도 나 하나면 충분하니까. 둘만으로도 세상은 완전하니까. 밤을 새워 셋은 피로연을 했다. 들뜬 목소리가 작은 방에 꽉 들어찼다. 혜은은 연신 깔깔대며 웃었다. 그때는 무엇이 그렇게 즐거웠던 걸까. 과연 무엇이 영원하리라 약속한 걸까.
“찾았다.”
반가운 마음에 혜은은 소리 내어 말하며 반지를 가리켰다. 점원이 반지를 꺼내주었다.
“선물이에요, 아니면 직접 하실 거예요?”
“제가 할 거예요.”
혜은이 손에 껴보는 모양을 보던 점원이 말했다.
“새끼손가락에 끼실 건가 봐요.”
혜은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손가락이 이렇게나 말라서 새끼손가락에 끼시려면 주문하셔야 해요.”
잠시 망연한 표정이 된 혜은에게 서둘러 점원이 덧붙였다.
“오래 걸리지 않아요. 이틀이면 될 거예요.”
그렇게 해달라고 하고 혜은은 백화점을 나섰다. 그가 선물했던 반지를 찾으면 약지가 아니라 중지에 끼워야할지도 몰랐다. 언뜻 시선을 돌린 쇼윈도에 바싹 마른 여자가 비쳤다. 심장이 먹먹해져서 혜은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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