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y는 아진 앞에 사진 하나를 던졌다.

“외국의 유명하지 않은 작가 그림이야. 꽤 괜찮은 그림인데, 시대를 잘못 타고났지. 그렇게 그려 와. 컬러톤이랑 스케치만 살짝 달리 해서. 지금 그리면 먹힐 것 같아, 네가 그리면. 어렵게 구한 사진이야. 우리나라 평론계에서는 알 리 없는 사람이니까 걱정할 건 없어.”

빨간색의 누드. 여자의 커다란 입과 성기가 붉은색으로 정면을 향해 되바라지게 벌어져있었다. 풀어헤쳐진 채로 꿈을 꾸듯이 내려뜬 눈은 타인의 누드를 바라보는 죄책감을 덜어내기에 충분했다. 헝클어진 머리칼. 커다란 장신구. 빨간색 하나로 명암을 달리 해서 그려진 여자는 아진을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데요.”

y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또 왜 그렇게 까탈을 부려? 꽃 그리는 것도 그만큼이면 됐잖아. 요즘 시대에 그런 꽃그림이 더 먹힐 것 같아? 네 외모로 시선을 끌 수 있을 때 이런 그림 하나 터뜨려줘야 너도 나도 먹고 살 것 아냐.”

아진은 고개를 들고 y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사람이건 그림이건 섹시하다는 건 매력적이라는 거잖아. 너무 적나라한 것 같기도 하지만, 너도 알잖아, 팝아트. 포르노가 아니라 팝아트라고 생각해. 그 선이나 터치 봐봐. 괜찮잖아.”

“모사화가를 부르시는 게 낫겠네요.”

아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y는 빙글대며 아진에게 다가와 사진을 아진의 가방에 넣었다.

“한 번에 승낙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고양이 같은 네가 한 번에 먹이를 덥석 물면 재미없지. 네가 아니면 이 그림은 다시 그려봤자야. 알잖아, 내가 왜 너한테 권하는지.”

y가 아진의 귀를 만졌다. 아진은 y의 손을 뿌리치지 못 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차에 탄 아진은 백미러에 비춰진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자신을 스쳐간 남자들의 숨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욕정으로 짙어지는 숨소리. 먹이를 앞에 둔 짐승의 것처럼. 아진은 소름이 돋는 팔을 움켜잡았다.

아진을 따라다니던 미술잡지 기자가 있었다. 그는 기사를 약속하며 아진에게 접근했다. 몇 개의 평론으로 이름을 얻어서 꽤나 위치에 올라가 있던 남자였다.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는 것으로 이름난 그는 온갖 미사여구로 아진의 아름다움을 찬양해댔다. 아진이 사람을 미치게 하는 빛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가 아진에 대해 쓴 잡지 기사는 짧고 간단한 것이었다.

‘미술계에서는 예쁜 축에 속하는 얼굴 덕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요즘 꽤나 주목받는 작가이다. … 하지만 그녀의 얼굴과 사생활에 대한 무궁무진한 논의에 비하면 그녀의 작품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녀를 대할 때 작품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죄책감이 드는 독자들이여, 그녀의 얼굴과 사생활이 예술의 일종이라고 여기고 우리가 기대하는 미술작가로서의 작품성과 진정성은 우리의 편견으로 여기자. 어차피 그녀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도 관객이 아닌 팬일지도 모른다. … 그녀는 미술평론지보다 여성 월간지를 통해 데뷔하는 편이 더 어울렸을 것이다.’

아진과 섹스를 하고 나서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진은 시동을 걸고 기어를 올렸다. 가방 안에서는 붉은 색의 장신구들로 몸을 치장하고 입을 벌리고 서 있는 여자의 누드가 있다. 아진은 가방을 노려보았다.

“내 그림을 보지 않은 건 너희야.”

아진은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18.

여자는 고사리무침만으로 밥을 먹었다. 할머니가 말해준 대로 하룻밤을 물에 재워놓은 뒤 압력솥에서 삶아낸 고사리는 양념장과 참기름에 볶아져 반짝거리는 윤기를 되찾았다. 탱탱하게 물이 올라 말리지 않은 고사리보다 더 질기지 않고 부드러웠다.

“이름을 몰라요.”

혜은이 말했다.

“네?”

“그쪽, 이름을 몰라요.”

“서아진이예요.”

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숟가락을 들어 밥을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밥을 씹으면서 속으로 여자의 이름을 발음해보았다. 여자는 여전히 젓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며 밥을 먹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아진씨. 합의금으로 100만원을 주셨으면 해요.”

여자는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아무 말도 되묻지 않고 그저 혜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100만원이면 너무 큰돈인가요?”

“아니, 큰돈은 아니지만….”

여자는 혜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혜은은 용기를 내어 합의금에 대한 말을 꺼낸 만큼 생각했던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이번 주말까지 주셨으면 해요. 합의서 같은 건 따로 경찰서에 가서 작성해야 하나요?”

여자는 잘 모르겠다며 알아보겠다고 말을 줄였다. 여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돈 얘기하려고 밥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 않나…”

고개를 숙인 채 밥 한 숟갈을 뜨던 여자는 말끝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여자는 숟가락을 놓고 먼저 일어나겠다며 일어났다. 여자가 남긴 밥이 그대로 밥그릇에서 식고 있었다.



“저기….”

문을 열었더니 여자는 예의 서늘한 눈매로 혜은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리고 말을 뱉었다.

“돈은 내일 주도록 하죠. 합의금을 주고 나면….”

“남편 선물을 주고 싶어서요. 조금 지나면 남편 생일이에요. 선물을 해주고 싶어요.”

차갑고 건조한 얼굴. 혜은은 잠시 말을 주저했다.

“남편 생일이 기일이에요. 그날 선물을 주지 못 했어요. 선물을 주려면 돈이 필요한데 저한테는 돈이 없어서….”

여자는 혜은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선물이 하고 싶어서요.”

여자의 얼굴에 표정이 실렸다.

“선물하기 위해 돈을 받는 게 좀 우습나요?”

“아뇨, 뭐… 우습다기 보다는…”

여자는 잠시 말을 찾다가 걸터앉아있던 침대에서 일어났다.

“씻어야겠어요. 나중에 이야기하죠.”

여자가 서둘러 혜은을 지나쳐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 소리가 들리기 전에 여자가 문을 건너 소리쳐 말했다.

“아까 밥을 남긴 건 미안해요. 맛있었는데 배가 불러서 그랬어요.”

혜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샤워기에서 뿜어 나오는 물소리에 묻혀 혜은의 작은 말소리는 여자에게 들리지 않았다. 혜은은 여자 방의 침대 시트를 매만져 정리하고는 방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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