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표지에 제 그림을 실어주세요.”
담배를 문 채 녹음기를 귀에 대고 오늘 인터뷰의 녹음상태를 확인하고 있던 지석이 눈을 돌렸다.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커버스토리로 제 인터뷰를 실어달라고 말하는 거예요.”
“너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야? 인터뷰 싣는 것도 말이 많아서 될지 안 될지 몰라.”
녹음기를 내려놓은 지석은 무시를 감추지 않았다. 아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죠. 제 그림이 괜찮으면 이런 얘기 안 해도 커버스토리 따위야 어렵지 않을 테니까요.”
지석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부탁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진은 대답 없이 살짝 내리깐 속눈썹에 기교를 담았다. 눈을 들어 바라보지 않아도 지석의 눈빛은 느낄 수 있었다. 아진은 태연하려 탁자를 응시했다.


지석은 모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환기를 위해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고 커튼을 여몄다. 침대 옆 간접조명의 주홍빛이 어두운 실내를 더욱 은근하게 만들었다. 아진은 그의 가슴을 부드럽게 밀쳐 침대에 눕혔다.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푸는 것을 그가 다 기다리지 못 하고 아진의 니트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길을 기억하고 아진의 유두가 도드라졌다. 지석은 아진을 눕혀 아진의 니트를 거칠게 벗겼다. 아진의 몸이 드러났다. 지석은 곧장 아진에게 들어왔다. 젖어들지 않은 아진의 성기가 쓰라렸다. 지석의 성기가 아진의 속에서 더욱 단단해졌다. 아진은 허리를 유연하게 움직여 그가 더 깊이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왔다. 그의 신음소리가 밭아졌다. 아진은 몸을 웅크려 지석과 몸을 더 밀착시켰다. 아진의 붉은 립스틱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 그가 반사적으로 키스하는 아진에게서 어깨를 떨어트렸다. a
“몸에 흔적은 남기지 마.”
아진은 몸을 돌려 지석의 위에 올라탔다.
“그런 거야 걱정 말아요, 나는 프로니까.”
지석이 거친 숨소리를 내쉬면서도 피식 웃음을 지었다. 지석은 두 손을 깍지 껴서 머리 밑에 두고 아진의 상체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쪽이야말로 내 몸에 아무 것도 남기지 말아요.”
아진은 자신의 성기를 조여 지석을 강하게 붙잡으며 말했다. 지석은 살짝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아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아진을 배로 눌렀다. 아진의 목을 깊이 끌어안은 지석은 속삭였다.
“여전히 매력적이야. 너와의 섹스는.”
아진은 함께 속삭이려 했으나 목이 막혀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탱고음악이 들려왔다. 울음을 감추려 아진은 더 거칠게 교성을 내었다. 아진의 교성과 함께 격하게 몸을 움직이던 지석은 짧은 탄성과 함께 아진의 안에 꾸물거리며 뜨거운 용액을 뱉어내었다. 지석은 성기를 빼내 일어나 티슈로 닦았다.
“너 피임은 하지?”
지석이 선반에서 타올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그는 피곤한 몸짓으로 목욕탕에 들어섰다. 샤워기에서 물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아진은 이불을 손으로 그러잡았다. 눈앞에 지석이 집어던진 티슈가 나뒹굴었다. 아직도 격정적인 선율의 탱고음악이 울리고 있었다.


16.
꿈을 꾸었다. 혜은은 놀라서 잠에서 깨었다. 너무 행복해서 이질적이고, 꿈속에서도 자꾸 현실이 아닐 거라 의심하다가 눈을 떴다.
새벽녘. 숨 막히는 적막과 무거운 공기. 혼자라는 게 이렇게나 무서운 것인지. 즐겁고 밝고 환하던 꿈은 의심하던 대로 정말 꿈이었다. 현실은 이토록 어둡다. 가슴께가 뻐근해왔다.
싸늘하게 굳어오는 외로움. 가위가 눌린 듯이 꼼짝할 수 없게 만드는 그의 부재.

방문을 열고 나오니 거실엔 여자가 앉아 있었다. 바에 앉아있는 뒷모습. 여자는 매끈하게 흐트러짐이 없었다. 와인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는 세련된 손짓. 정물화처럼 정돈된 여자의 아름다움에서 혜은은 알 수 없는 연민을 느꼈다.
혜은은 소파에 앉았다.
“와인, 좋아해요?”
여자가 혜은의 기척을 느꼈는지 물었다.
“마셔본 적이 없어요.”
여자는 고개를 돌려 혜은을 바라보았다. 화장을 지우지 않은 얼굴이었다. 마스카라가 짙게 드리운 눈매가 길고 서늘하고 아름다웠다.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이야기하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붉은색 립스틱이 새하얗고 또렷한 얼굴선과 어우러져 도발적이고 현대적이었다. 혜은은 여자의 얼굴이 매우 아름답다고 느꼈다. 여자는 와인 병과 잔을 들고 소파 쪽으로 걸어왔다. 탁자에 병과 잔을 두고서 바에 가서 잔을 하나 더 꺼내왔다. 여자가 혜은의 옆에 앉았다. 이미 볼에 발그레한 기운이 올라있었다.
“술 먹을 수 있긴 해요? 책임 못 질 것 같으면 먹지 말고.”
여자는 무표정하게 혜은에게 잔을 내밀었다. 혜은은 잔을 받아들면서 웃어보였다.
“이젠 많이 괜찮아요.”
혜은은 대답하고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베란다 커튼 사이로 밤의 명멸하는 빛들이 보였다. 새벽이라 어두워진 어둠조차 도시의 빛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스러지기 직전의 색들이 뭉그러지고 있었다. 혜은의 시선이 베란다에 가있는 것을 느꼈는지 여자는 혜은의 잔에 와인을 따르고는 베란다로 가서 커튼을 젖혔다.
도시의 밤.
밤은 저물지 않는 색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어둠 속에서 더 진한 향을 내뿜는 것은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 빛의 조각들이다. 여자는 돌아와 소파에 몸을 묻고는 말했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거 이럴 땐 참 좋죠.”
낮엔 참기 힘들어도, 여자가 조그맣게 덧붙이며 와인을 마셨다. 혜은은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집에서는 죽지 말아요.”
혜은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가 술을 마시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죽고 싶더라도 이 집에서는 죽지 말라고요. 시체를 치우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혜은은 피식 웃으면서 잔을 내밀었다. 여자가 와인을 따랐다. 옅은 분홍빛을 띠는 장미향 와인이었다. 달콤하고 깔끔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약속할게요. 이렇게 맛있는 와인도 얻어먹었으니까.”
여자가 일어나 베란다의 창문을 열었다. 술을 먹어서인지 덥네, 라고 중얼거리는 여자의 뒷모습이 유난히 정돈되어 보였다. 밤바람이 거실로 스며들어왔다. 떠도는 빛의 향연들 틈에서 쉴 곳을 발견하지 못 한 어둠의 한 자락이 슬며시 바람과 함께 혜은에게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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