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지석은 창밖을 바라보며 담배를 물고 있었다. 담배연기를 빨아들일 때 드러나는 신경질적인 눈가의 주름. 어두운 바에서 그의 얼굴에 비친 조명이 유달리 얼굴의 윤곽을 강하게 나타나도록 도왔다. 광대뼈가 불거져 보통의 조명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피로가 비쳤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그가 아진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대리석으로 장식된 바닥에 아진의 하이힐 굽이 부딪혀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지석은 아진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피식하고 미소를 지었다.
“네가 뜨는 이유가 역시 있구나. 이렇게 화려하게 꾸며놓으니까 다른 사람 같네. 다들 네 작품 욕하면서도 네 얼굴 한 번 보려고 하는 이유를 알겠다.”
지석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틈을 발견하려 했으나 그는 그런 것을 내보이지 않았다. 느리고 끈적한 재즈음악이 바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너는 붉은 색이 안 어울려, 알잖아.”
?梔??소파에 깊이 몸을 묻으며 말했다. 아진의 입술에 발린 빨간 립스틱이 꿈틀댔다.
“인터뷰하시죠.”
?梔??어깨를 으쓱하며 양손을 내밀어 보였다.
“지금은 아무런 준비도 안 되어 있는 걸.”
?岺?壙?하지,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지석은 웨이터를 불렀다.
“너는 블루사파이어지?”
아진이 지석을 노려보았다. 그처럼 자연스럽게 상대를 짓밟을 수 있다면. 자꾸만 지난 일을 곱씹지 말고 여유로운 눈짓으로 그를 내려다볼 수 있다면. 지석은 웨이터에게 블루사파이어와 블랙러시안을 주문했다.
“인터뷰하지 않을 거라면 가겠어요. 다음 일정이 있어요.”
블루사파이어와 블랙러시안이 나왔다. 짙게 침잠하는 블랙러시안과는 달리 블루사파이어의 투명한 파란색이 경박하게 느껴졌다. 지석은 잔을 들어 칵테일을 한 모금 머금고는 아진의 귀걸이를 바라보았다.
“y랑 만나기로 했나?”
지석의 말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뭘 그렇게 놀라. 이 바닥에서 y랑 너 모르는 사람 있나?”
지석은 소파에 파묻었던 상체를 일으켜 테이블에 팔을 괴고 아진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의 갈색눈동자가 아진의 눈에 닿았다.
“나도 꽤 괜찮잖아, 주간미술 편집장에 y보다는 훨씬 젊고.”
지석의 빙긋거리는 눈짓이 진득하게 아진의 목 언저리에 와 닿았다.
아진은 핸드백을 들고 일어섰다.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돌아서 나오는 아진에게 지석의 말이 엉겨 붙었다.
“다시 연락할게.”
바의 정문을 빠져나와 아진은 귀걸이를 빼서 계단 밑으로 집어던졌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귀걸이에 붙어있던 보석들이 찬란한 소리를 내며 계단을 굴러 떨어져 내렸다.

12.
새벽부터 눈을 뜬 혜은은 창문을 열었다. 하늘이 음울하고 공기가 차가웠다. 혜은은 얼마간 망설이다가 옷을 챙겨 입었다.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그에게 다녀와야 한다. 혜은은 근처시장에서 산 낡은 정장을 꺼냈다. 정장을 입고 현관의 전신거울 앞에 섰다. 나쁘지 않았다. 오랜 옷에 배어있는 편안하고 익숙한 냄새가 마음에 들었다. 윤기 없이 갈라진 갈색머리를 하나로 묶었다. 창백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혜은은 여자의 방문을 잠시 바라보고는 현관을 나섰다.
혜은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아릿한 통증을 느꼈다. 지하철역에 다다르기까지 혜은은 자꾸만 걸음을 멈추었다. 심장에 물이 차오르는 것 같아서 혜은은 이를 악물었다. 울어서는 안 된다.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 5년간을 에둘러온 길이다. 지하철역 앞에서 혜은은 고개를 숙였다. 어지러웠다. 그는 어디에 있는 걸까. 끝내 길 한복판에 주저앉은 혜은은 가만히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아무리 되뇌어도 몸은 두려움으로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어디에 있는 걸까. 춤추듯 일렁이는 공기가 겁이 났다. 이렇게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에서 혼자라니. 그는 어디에 있는 걸까. 나를 붙잡아 일으켜줘. 길을 잃어버렸어. 혜은의 목소리가 마른 몸을 흔들었다.
빗방울이 떨어졌다. 후둑후둑 조금씩 굵어지는 빗방울이 혜은의 옷을 적시고 있었다. 혜은은 살짝 고개를 들어 어둑한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한층 밑으로 내려와 있었다. 혜은은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재환은 술을 사서 집으로 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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