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형 교수(사학 전공)

우리 전통사회에서 임금(君)은 스승(師)이었고 아버지(父)였다. 그 옛날, 한 국가의 아버지인 임금은 사도(師道)를 겸했다. 3황5제의 요순(堯舜)시대를 거쳐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의 임금들은 성인(聖人)으로서 백성을 가르쳐 문화적 성취를 이루고 태평성대를 열었다고 전한다. 이상적인 유교적 세계관의 황금기를 개창한 것은 백성을 위한 성군의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경(書經)’에는 ‘임금이 되게 하고 스승이 되게 한다’고 했고, ‘대학(大學)’에서는 ‘반드시 하늘이 명하여 백성의 군사(君師)로 삼는다’고 했다.

군사부일체의 이념은 성리학이 융성했던 조선시대에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통해 일반 백성의 일상 속 깊이 침투했다. 중세 유럽사회에서 스테인드글라스의 성화처럼, ‘삼강행실도’는 글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이념 고취의 창(窓)이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이념은 그림의 형용과 설명을 통해 전달됐고, 군사부(君師父)는 백성들이 “집집이 모두 효순(孝順)한 아들이 되고 나라 안은 모두 충성된 신하갚 되기를 희구했다.

일상 속에 내재화된 군사부일체의 이념은 군주제가 사라진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가부장적 정치이념과 욕망 때문이었다. 1948년 제헌과정에서 국민은 국가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자리 잡지 못했고 이승만은 그렇게도 고대했던 ‘국부’의 자리에 올랐다. 직계 7대조로부터 자신의 대에 이르기까지 벼슬에 오른 이가 없었지만 양녕대군의 16대손이었던 이승만은 미국에서 ‘한국의 왕자’라고 자랑했다. 그리고 그의 어그러진 왕손의식은 국민의 종복으로서의 대통령직을 국가의 아버지가 군림하는 자리로 변질시켰다.

그 후, 4·19의 민주이상과 꿈을 철저히 짓밟은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통해 ‘가난과 위협에 직면한 우리나라’를 구원하고 이끌고 갈 유일한 아버지임을 과시했다. 장기집권의 야심을 제도화하고 독재자의 권력을 한국적인 것이라고 호도한 유신헌법은 대통령을 국가의 존속을 보장하는 호국의 아버지로 신격화시켰다. 그리고 대통령의 어머니인 헌법은 대통령의 뜻을 잘 따르는 효순한 아들로 전락했다.

민주화 항쟁의 성공으로 그나마 유신헌법과 군사독재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가부장적 정치문화는 청산되지 않고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대통령을 아버지라 부르는 권위주의적 태도와 망탈리떼는 여러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 오늘날 대통령을 대놓고 국부라고 부르지 않지만, 대통령 부인은 지금까지도 국모로 호칭된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되었을 때 탄핵지지를 표명한 어떤 인사가 “고등학교도 안 나온 여자가 국모 자격이 있습니까?”라고 비하발언을 했다. 당시 한 방송사는 발언맥락을 왜곡하면서 이 발언을 문제 삼기까지 했다. 이 일로 심각한 정치 논란과 공정성 시비가 일어났지만, 그 누구도 ‘국모’의 언급을 개탄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또한 권위주의적인 ‘아버지’론이 우리 사회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강정구 교수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과 관련하여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발동한 수사지휘권이 문제되었을 때다. 김종빈 검찰총장이 이에 반발하여 퇴임하게 되자, 서울지검의 한 검사는 검찰총장을 ‘아버지’라 부르며 천 장관의 퇴진을 촉구했다. 이런 식의 조직 수장에 대한 존경심은 대통령을 ‘더 큰 아버지’로 전제하고 군사부일체의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서양의 전통사회에서도 국가는 하나의 대규모 가족이었고 군주는 국가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1793년 1월21일 프랑스인은 주저하지 않고 루이16세를 단두대로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극적으로 환호했다. 근대시민혁명을 통해 근대인은 군주로부터 부성(父性)을 빼앗아 군주도 하나의 인간, 모든 국민과 동등한 인간임을 선언하고 국가의 가부장적 권위를 해체했다. 그리고 모든 시민은 평등한 형제가 되었다.

우리 헌법은 그 누구도 법 위에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의식적이든 상징적이든 혹은 현실적이든 아버지 군주의 처형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 정치체제와 같은 공화국에서, 존경의 대상으로서의 맏형, 선생으로서의 맏형은 있을 수 있어도, 군림하는 아버지는 존재할 수 없다. 일상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가부장적인 권위주의 체제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국민의식과 정치행태 속에서 먼저 ‘아버지 대통령의 처형’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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