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석 교수(주제통합형교양/ 자연과학 영역)

독일에서 유학하던 시절 종종 사회적 화두가 되었던 외국인 문제 때문에 내걸렸던 어느 공공 캠페인 포스터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있었다. 그 문장은 내게 작은 감동으로 읽혔고 그 후 마음에 남았다. “우리는 세상 거의 어느 곳에서나 외국인입니다.” 그렇다. 제 아무리 넓어봤자 지구 전체 면적의 1%도 안될 제 나라 영토를 뺀 모든 장소에서 우리는 외국인이다. 난 외국인 문제를 거론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이 문장을 조금 응용해보고 싶다. “우리는 누구나 세상 거의 모든 영역에서 비전문가입니다.” 내가 아무리 날아오를 듯한 기상과 끈기로 젊은 날을 전문성의 연마에 바친다 해도 정복할 수 있는 영토는 기껏해야 몇 군데, 겨우 내 팔꿈치를 휘두를 만큼의 공간이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내 전문 영역 밖에서 나는 언제나 비전문가이고, 서투른 사람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안타깝거나 부끄러울 이유가 없는 사항이다.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만일 아무 전문성도 갖추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고, 자기가 가지지 못한 전문성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손잡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아쉬운 일이다.
얼마 전 면담시간에 찾아왔던 한 학생 이야기다. 이 학생은 중고등학교 시절 매사에 아주 자신만만한 학생이었고 주위에서도 기대와 촉
망을 받는 사람이었던 듯했다. 또 그녀는 학과 공부도 잘 했지만 다른 면에서도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학생이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는 이화에서 생활한지 2년째에 접어든 지금 이화의 문을 두드리던 그 때보다 자신감이 많이 수그러들었다고 했다. 딴에는 정말 열심히 시험 준비를 했는데 겨우 평균 정도의 점수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내가 정말 이것 밖에 안 되는갗 의심이 되었다고 했다. 요즘 표현으로 OTL… 좌절이었나 보다. 그 날 면담시간에 나는 이렇다 할 조언을 주지 못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 이화의 학생들이 얼마나 많을지 생각해보았다. 자타가 공인하는 이화인들의 역량, 그러나 누구에게나 자신감의 약화와 상실은 찾아온다. 어떻게 하면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 날 면담에서 이어진 고민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나는 이화의 학생들에게 먼저 ‘자신 있는 영역’을 하나 만들라고 권하고 싶다. “다른 문제는 몰라도 여기서만은 내가 자신 있다구!”라고 말할 만한 영역 말이다. 영역이라는 말이 너무 막연하게 들릴는지 모르겠다. 자기가 전공하는 분야 전체가 막막해 보일 때, 중요하다고들 하는 특정한 주제나 어느 교과목에 집중해보기 바란다. 아니 그런 교과목 전체가 아니어도 좋다. 그 과목에서 다루는 주요 문헌 중에서 교과서에 해당하는 책 딱 한 권만 꼭꼭 씹어 마스터해보자. 아니, 1차 목표는 더 작아도 좋다. 그 책에서 어느 특정한 주제에 관한 부분만 정말 자신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파고들어 보자. 예를 들어 생물학 교과서를 들고 “나는 세포 구조에 관한 내용은 눈 감고도 좔좔이지” 또는 “이 책에 나오는 광합성 이야기는 아마 교수님도 나보다 더 자세히 알고 계시긴 어려울걸” 이렇게!
그런 영역 하나를 붙잡았다면 그녀는 이미 아주 요긴한 출발점을 얻은 것이고, 중대한 경험을 한 셈이다. 이제 그 교과서의 다음 부분도 그녀의 정복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다른 주제와 다른 영역들도 그녀의 발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전문가들은 수많은 문헌을 접하고 엄청난 양의 정보를 섭렵하지만 그런 정보를 나름대로 정리해가면서 알짜 지식을 형성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은 이처럼 진하게 꼭꼭 씹어가며 통달한 단 몇 권의 교과서로부터 온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고 여러 분야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멀티전문성의 능력도 이렇게 한 영역씩 착실히 접근하지 않고는 도무지 얻을 길이 없다.
물론 이런 일은 한두 달 안에 되는 일도 아니고 착착 자동으로 진행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좌절은 언제라도 다시 찾아온다. 그래서 끝으로 누구의 것인지도 모른 채 내가 기억하고 있는 문장 하나를 소개한다. “자신감은 수많은 좌절이 제대로 쌓였을 때 이루어진다.”(Confidence is a real accumulation of frustrations.) 누구나 좌절을 경험한다. 문제는 좌절의 경험을 누가 잘 정제해서 차곡차곡 쌓느냐 하는 것이다. 좌절 더미 위에 세워진 자신감은 그것 없이 생긴 자신감보다 열배쯤 강하다. 이화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너무 나쁘지 않은 좌절과 그 위에 피어난 강인하면서도 유연한 자신감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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