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통합형 예체능영역교양 김애령 교수

우리의 독서는 시작되기 전에 방해를 받는다.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기 위해 뛰어야 하고, 지금하고 있는 일 이후에 해야만 하는 일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숨조차 가쁘게 쉬어야 하는 생활리듬은 여유롭게 책을 펼 시간을 찾기 어렵게 한다. 밖으로부터 끊임없이 침투하는 소음의 간섭은 조용한 마음의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책읽기의 집중은 빈 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공간이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다.

우리의 독서는 시작되기도 전에 방해를 받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 것도 읽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눈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읽는다. 아니, 본다. 우리는 망막을 때리는 문자와 영상의 홍수에 노출되어 있다. 초고속망을 통해 도착한, 자판 하나만 누르면 떠올랐다 사라지는 무수한 디지털 신호들이 우리를 묶어둔다. 새로운 디지털 매체는 시공간 감각을 바꾸어 놓았다. 활자문화에 익숙하던 사고방식은 컴퓨터와 디지털 네트워크의 신환경 속에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만 할 시점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필요한 정보를 찾기 위해 책을 읽지 않는다. 전자도서관의 훌륭한 검색 시스템은 순차적인 독서를 대체하는 발췌적 지식 습득의 새로운 장을 연다. 새로운 매체환경은 책의 운명, 독서의 방식을 바꾼다. 그러나 나는 디지털 코드의 확장과 더불어 문자 텍스트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는 이 분석과 전망을 빌렘 플루서의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라는 ‘책‘에서 읽었다.

책 읽기가 언제나 누구에게나 권장되었던 것은 아니다. 슈테만 볼만의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는 책 읽는 여자의 초상화들을 분석하며 여성 독서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18세기까지만 해도 독서는 통제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책을 읽을 때 생기는 신체 활동 부족은 상상력과 감정이 억지로 뒤바뀌는 것과 결부되어서 근육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가래가 들끓고, 가스가 차고, 변비가 생기도록 만드는 것이며, 잘 알려진 것처럼 특히 여자의 경우 생식기에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이 경고는 독서가 일상의 의무와 속박에서 벗어나 게으르고 자유로운 사적 사유공간을 허용한다는 사실에 대한 경계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그녀는 책을 읽는 동안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자유로운 공간을 획득하고, 독서를 통해 세상에 대해 남자들이 제시한 것과는 다른 자신 만의 상을 갖게 되고, 독립적인 자신감을 획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책 읽기 자체가 해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해방공간으로의 입구가 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가사의 의무와 여성으로서의 역할에서 손을 놓고, 잠시 여성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 스스로 생각하는 독립적인 여자는 남성 지배질서의 위협이다.

금지 또는 검열의 시선을 피해 여성들은 남성들과 다른 방식으로 책을 읽었다. 권위적인 텍스트를 통해 지식과 정보를 얻으려는 남성적 독서와 달리 지적 권위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여성들은 훨씬 자유롭게 책을 읽었다. 발췌해서 읽는 부분적 독서, 비 권위적 독서, 오해를 허용하는 독서, 감정적인 독서, 무작위적인 독서는 예전부터 여성들에게는 익숙한 책 읽기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런 유연하고 자유로운 독서의 방식은 바로 디지털시대에 통용되는 새로운 독서태도이기도 하다. 여성들은 남성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책을 읽는다. 루트 클뤼거는 남성독자들이 책 속의 여자주인공이나 여성작가의 관점에 동일시하기를 어려워하는 것과는 달리, 여성독자들은 여자주인공 못지않게 남자주인공, 작가와도 폭넓게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 책에 담겨있는 책 읽는 여자들의 그림은 아름답다. 내면으로의 온전한 침잠, 자기와의 대화. 책읽기는 다른 세계를 열어준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대합실, 시끄러운 길모퉁이의 카페, 분주한 건물의 로비도 자유로운 꿈의 공간이 된다. 여유로운 시간과 공간이 독서의 조건이 아니라, 독서가 여유로운 시간과 공간의 생산력이다. 디지털 코드의 홍수 속에서 쏟아지는 정보의 속도에 정신을 잃을 때, 손가락을 책갈피 사이에 끼워두고 지금까지 읽은 것을 골똘히 반추하는 이 책에 실린 그림 속의 여자들은, 그 어떤 개입도 허용하지 않는 정지의 순간, 책 읽기의 즐거움을 그리워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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