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연

 33기, 쌍용홍보실 근무

 이제와 생각해보면 참으로 뜨겁게 보낸 세 학기였다. 모든 것이 서툴고 어색하기만 했던 1학년말 「기자」라는, 그 나이 또래에겐 다분히 매력적인 그것에 끌려 시험을 치고 이대학보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후 수습기자, 정기자, 부장을 거치는 동안 나는 늘 풀먹인 듯한 팽팽한 긴장감을 잃기 않아야 했다. 대학에서의 학생기자의 역할에 대해 서서히 눈떠가기 시작해서였기도 했지만, 객관적인 분위기나 조건또한 한시도 날 나태하도록 놓아두질 앟았다.

 내가 학보사에 막 들어와 수습훈련을 받고 있을 때, 정부가 돌연 「학원자율화」조치를 발표했다. 학생쪽에서는 이 조치도 결국 「자율화」하는 미명하게 행해진 또다른 학원탄압책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강경일색이었던 이전의 정부 태도에 비해 표면적으로는 참 많은 변화가 왔다. 정부의 강경책에 억눌려왔던 학내의 활동들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중 하나가 바로 학생화 부활작업이었다. 다른대학에서 학생회가 부활되기 시작하지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어 갔고 드디어 85년 봄, 학생회가 부활됐다.

 게시판마다엔 후보들이 명단과 공약이 나붙었고 운동장에서, 잔디밭에서 선거유세가 진행되었다. 그때까지의 학도호국단 체제와 학생회 체제는 여러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지만 무엇보다 학도호국단이 학생대표를 선거인단이 간접선출하는데 반해 학생회는 학생들이 직접선출한다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

 드디어 투표날, 취재부는 모든 시선과 관심을 그곳에 집중했다. 지금은 낯익은 일이나, 직선제를 처음 경험한 우리였기에 곳곳의 투표장을 뛰어다니며 투표상황을 취재하는 일도 큰 일이었지만, 밤새도록 진행되는 개표상황을 취재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학생회관에서 진행되는 개표상황을 밤을 꼬박 새우며 지켜보면서 우리들은 가슴이 뻐근해져 옴을 실감했다. 「기자」된 보람을 진하게 느껴본 순간이었다.

 이대학보 기자직을 퇴임한 지 벌써 4년. 학교를 졸업한지도 3년이 가까워온다. 큰맘 먹고 오랜만에 대학시절 즐겨입던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나서도 날 학생으로 보아주는 이는 서운하게도 없다. 어디 외모뿐인다. 생각도, 가치관도, 나도 모르는 새 내 뜻과는 먼 곳으로 떠밀려와 있음을 느낄 때가 잦다. 스스로 「기자」임을 자랑스러워하던 자존심과 등지, 책임감과 열정들을 아직도 지키고 있느냐는 자문에 자신이 없어지기도 한다.

 「사회에의 적응」이라는 구실로 대중 현실과 타협하며 편한 생활방식에 편승해 버렸는지도 모르는다.

 그러나 난 아직도 신문을 펼쳐들면 코를 찌르는 잉크냄새를 좋아한다. 늘 기자에게 요구되는 「객관적 자세」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무게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후배들의 치열함을 아끼고 사랑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학내의 정론이기를 피나게 노력하는 이대학보를 사랑한다.

 이런 사랑은 나 자신을 채찍질하고 다듬는데 큰힘이 되어주곤한다. 열심히 고민하고 뛰어다니던 나의 이대학보사 기자때의 모습과 후배들의 더욱 열심인 모습을 함께 가슴에 새길수 있음은 그래서 퇴임기자인 내겐 퍽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