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우리 학교 합창부는 학생들을 강제로 데려다가 맹연습을 시키기로 유명했다. 어느 날, 합창부 지도 선생님께 불려갔던 내 친구가 온통 눈물 범벅이 돼 돌아왔다. 합창부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거절하자 선생님은 ‘네 부모가 그렇게 가르치더냐’부터 시작해 수없이 인신공격을 퍼부었던 것이다.

나는 그 선생님의 부당한 처사에 화가 나 부들부들 치가 떨렸다. 그리고 그날 밤 학교 자유게시판에 ‘합창부 지도 선생님을 규탄하는 글’을 올리기에 이르렀다. 치솟는 조회수를 보며 나는 정의의 사도가 된 것처럼 우쭐해져서 잠이들었다.

그러나 다음 날, 나는 합창부 선생님께 불려갔다. 그때서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제의 정의감은 간 데 없이 두려움에 부들부들 온몸이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나의 사건은 꾸지람만 잔뜩 듣고 글을 삭제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 일은 두고두고 내 마음에 남았다. 어린 마음에, 내가 쓴 글이 불러올 파장에 대해 미리 생각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랄까. 시간이 지날수록, 정당했던 문제제기가 징계로 끝을 맺은 것이 못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며칠 전 이건희 회장의 명예 철학박사 학위수여식 저지시위를 벌인 학생들이 언론을 통해 마치 폭력적이고 단순무식한 ‘반란자’로 묘사되고 본교 학생들마저 이들을 마냥 비판하고 나서는 과정을 지켜보려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의 시위 방식에 대한 비판만 있을 뿐 그들이 주장한 내용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논의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나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서 그 문제를 다같이 고민할 수 있기를 바랐다. 비록 쏟아지는 꾸지람에 겁에 질려 본 뜻은 금방 수그러들고 말았지만. 정당하다고 생각한 문제제기가 아무 편견 없이 내용 그대로 받아들여 지기를 바랐다.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지만 그로 인해 이뤄지는 논의 과정에 의해 문제는 점차 해결점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제기가 순수하게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기엔 아직도 갈 길이 먼 듯 하다. 이번 고대 사건이 터진 직후 나는 기부자에게 명예학위를 수여하는 것·노조 없는 경영 윤리 등에 대한 당부를 가리는 논의가 들끓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문제의 본질은 그냥 묻혀졌다. 그들은 여전히 주장을 굽히지 않고 ‘다함께’ 논의하자고 외치고 있음에도, 개방적이리라 생각했던 대학생들 사이에서조차 시위 방식을 비난하는 목소리만 거세다. 꼭 필요했고, 중요한 문제제기 였음에도 이번 사건은 그저 ‘젊은 혈기가 저지른 치기어린 반란’ 정도로 기억될 것 같다.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들은 하루 아침에 해결되지 않는다. 지속적인 문제제기와 그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나 아무도 문제제기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회는 흐르지 않는 강물처럼 썩어버리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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