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원을 만나는 일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냥 스치고 말았을 우연을 일적으로나마 연결시킨 기쁨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대립되는 양측을 취재하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나에겐 큰 고문이다. 공개된 자리에서 양측의 의견을 듣는 것이 아닌, 각 집단을 개별적으로 만난 후 기사를 작성해야 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그건 내가 발품을 배로 팔아야 하는 힘겨움 때문만은 아니다.

특정 사안에 대한 양측의 해석이 전혀 다르다는 점이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내 이성은 이미 제 기능을 잃고 만다. 양측 모두 자기논리로 철저히 무장한 상태에서 강변하기 때문에 내 판단력만으로는 시비를 가리기 어렵다. 그래서 이런 경우엔 사안에 대한 일반 이화인의 의견을 묻거나, 선배 기자에게 조언을 구해 기사의 틀을 잡는다.

두 번째 고문은 내가 그들을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만나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취재에 임할 때 나는 ‘그’가 아닌 ‘그들’의 의견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개인의 독단적 주장보다는 집단화된 주류의 의견이 양질의 기사를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사실, 개인을 특정 집단의 대표자격으로 취재하다 보면 취재원과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수위는 일정 수준을 넘어갈 수 없다. 내가 상대에게 그 이상의 대화를 요구하면 어김없이 “그 사안에 대한 제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릴 수는 없고요”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것.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건 알지만, 취재원과 정해진 대화 이상은 나눌 수 없는 어색함이 가끔은 나를 너무 갑갑하고 괴롭게 한다.

마지막 고문은 특정 사건을 독자들에게 최대한 객관적으로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부서의 특성상, 학내에는 내가 쓴 기사 한 줄, 어휘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집단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사를 작성·교정할 때마다 모호한 의미의 어휘는 없는 지, 멘트가 너무 한 편의 의견에만 치우치지는 않았는지 점검하곤 한다. 이렇듯 한 기사의 점검과정에 기자 대여섯 명이 매달려 촉각을 곤두세우고 노력하지만, 신문이 나오는 월요일 아침이 되면 항상 ‘아차’ 싶은 문장이 생기곤 한다.

학보사에 들어온 지 벌써 1년이다. 어려운 취재가 있는 주는, 특히 마감이 있는 금요일엔 취재 걱정에 하루가 1분처럼 간다. 그래도 이미 발을 들여놓은 이상, 우리는 이곳에서 끝을 봐야 한다. 모순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곳이 제일 지긋지긋하고 그 어떤 곳보다도 가장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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