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반짝거리는 웃음이 너무 예뻐서 재작년 이맘때 쯤 성당에서 초등부 주일학교 선생님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가르치던 2학년 하나반에는 약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다리가 불편해 잘 걷지 못하는 아이도 있었고, 말을 더듬는 아이도 있었다.

발표를 할 때 자신을 지목해주지 않으면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도 있었고, 반장을 시켜달라고 떼를 쓰는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모여 한 반을 이루고 투닥투닥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다름’이 훼손되지도, ‘다름’이 곧 ‘차별’로 이어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수건돌리기를 할 때면 다리가 불편한 친구 뒤에 수건을 놓고 일부러 천천히 뛰어서 잡혀주던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 아이들을 떠올리다 보면 늘 ‘아메리칸 퀼트’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영화에서 주인공 핀(위노나 라이더)의 할머니는 말한다.

“세상은 퀼트 이불과 같은 거란다 얘야.” 세상이 정말 퀼트 이불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 다른 조각들이 모여 제각각의 무늬를 지닌 채 하나의 큰 조각보를 이루는 것이다.

자신의 무늬를 감출 필요도, 남의 무늬를 가릴 필요도 없는 퀼트 이불. 가장자리만 촘촘하게 박아서 꽁꽁 연결시켜 주면 그것으로 족한 포근한 퀼트 이불 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그런 퀼트 이불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아니, 이미 하나의 조각으로 속해 있으면서도 가장자리에 박혀진 실을 뽑아내지 못해 안달인 것 같아 씁쓸해지곤 한다.

세상은 완벽한 것들의 모임이 아니라 불완전한 편린들의 조화고, 그 때문에 서로 보듬어 주고 나눠줄 수 있어 더욱 아름답다는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 같다.

원래 진리란 눈부신 것이어서 맨눈으로 보면 눈이 멀어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진리의 여신도 베일을 쓴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진리라는 것의 형체를 알아 볼 수도 없을 만큼 너무 두꺼운 베일로 눈을 가려버린 것 같다.

아니면 아예 눈을 감아버린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진리를 외면한 채 나와 다른 무늬를 지닌 사람을 제외시키려는 우리의 욕심은 종종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기도 한다.

대통령이 특정 정당에 대해 지지 발언을 했다고 해서 단숨에 탄핵시킨다거나, ‘왕따’를 시켜 한 친구의 마음 속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거나 하는 일들 말이다.

이런 일들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서 오히려 이를 보고 어리둥절해 하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범죄자는 112에, 화재는 119에 신고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의 마음에 입힌 상처와 피해는 과연 어디에 신고해야 할까? 봄이라곤 하지만 아직 바람이 쌀쌀하다.

퀼트이불처럼 포근하고 조화롭게, 서로를 덮어주며 살 수 있다면 좀 더 따뜻한 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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