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여자 탤런트의 누드집이 앞을 다투어 출판되고 있다.

마치 멋진 여배우라면 누드집 하나 정도는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한 분위기이다.

상황이 이쯤 되고 보니 평범한 누드집의 발간은 더 이상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자극적인 주제로 컨셉을 달리하는 특성화가 필요해진 것이다.

이승연씨의 누드집도 누드 열풍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제스추어로 해석된다.

그들은 이번 누드집이 역사적, 철학적 가치를 담은 심오한 예술작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은 3 1절을 앞두고 역사의 아픔이라는 사회적 이슈에 편승해, 누드집의 홍보효과를 노렸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그들이 정말로 피해 당사자들 편에 서서 역사적, 철학적 가치를 지닌 작품을 만들어내려고 했다면, 그들에게 사후에 변명하거나 그들을 설득하려고 하는 대신, 먼저 그들과 상의해서 그들의 허락을 받아냈어야 했다.

누드 열풍은 그 자체만으로도 부정적인 사회 현상이다.

이는 여성들 스스로가 자기애와 자존심을 던져버리고 자신의 몸을 상품화하는 행위라는 심각한 사회 문제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누드는 여성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담긴 건강한 시각 안에서 만들어질 때에만 가치가 있다.

더구나 이번 이승연씨의 누드집은 누드 열풍이 몰고 오는 여성 정체성의 논쟁 차원을 한층 더 넘어서서 사회 윤리적인 문제까지 담고있다.

이번 사건에 있어서 누드집이 성의 상품화냐 예술이냐 하는 논쟁은 이차적인 문제이다.

성의 노리개로 끌려가 피해를 당한 당시의 기억 때문에 성적 묘사가 담긴 TV장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종군 위안부들에게 이번 누드집은 또 다른 고문으로 다가가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잘못과는 무관한 과거의 상처로 인해 삶 전체가 휘청거리는 그들에게서 또 다시 수치심을 들춰내는 행위는 그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다.

이번 누드집을 발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어머니나 딸이 종군 위안부로 끌려갔어도 누드집을 강행할 수 있었을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볼 일이다.

위안부들의 상처는 일부 주변인들의 상처가 아니라 우리나라 여성 모두의 상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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