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탁한 공기 사이로 스며나오는 꽃나무의 그윽한 향내, 물기를 가득 머금은 듯 싱그럽기만 한 여린 잎새들의 향연과 함께 찾아온 오월. 대학 캠퍼스는 이 오월과 닮은 구석이 많다.

대학에서 숨쉬는 숱한 ‘젊음들’­투명한 눈으로 역사를 돌아보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젊은 그들­의 존재만으로 대학을 ‘오월 빛깔’이라 명명한다면 대책없는 낭만주의자라 책망이라도 들을까. 젊음 자체는 물론 그 소유자들에 대한 내 전폭적인 신뢰 위에, 총선을 한 달여 남겨둔 어느날 마련된 총선토론회 자리에서 들었던 한 교수님의 음성에 오버랩된다.

“시민사회의 변화를 준도해야 할 청년이자 지식인인 여러분은 지금 오히려 불신과 무관심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대학생의 정치적 무관심’은 대학생 당사자에게는 물론 사회적 인식 차원에서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하나의 명제가 돼 버린지 오래다.

‘진보 지향의 실천적 지식인, 대학생’에 대한 당위론적 기대는 ‘무관심’으로 점철된 젊은 세태를 통한, 규탄하기에 이르렀고 반복되는 비판 속에 그들도, 우리도 함께 무뎌져 갔다.

이런 상황이거는 ‘여러분은... 어디 있습니까.’이 외마디 질문 앞에 뜻 모를 허허로움으로 넋을 놓아야 했던 이유는 뭘까. 매년 선거 때마다 50여만명에 이르는 대학생 유권자 표가 사장된다고 한다.

선거권이 있는 만20세 이상 대학생 1백60여만명 중 주소지를 벗어나 서울과 지방도시에서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전국적으로 54만명에 달하며 이들 중 실제 부재자 투표에 참여하는 학생은 3만∼3만5천명에 그치기 때문이다.

선거때만 되면 대학생유권자운동본부, 총선투쟁본부 등의 조직이 결성돼 ‘선거혁명’을 부르짖어 온 대학가의 외침이 실상 공허한 ‘메아리’는 아니었던가 자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같은 자문은 비단 선거에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다.

총선 열기 덕분인지 2000년 4월19일은 어느해보다 조용히 저물어 갔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각 대학 총학생회에서 준비한 4.19 기념 행사들은 참여 인원 ‘절대부족’으로 폐기되거나 썰렁한 가운데 진행됐다.

우리 학교 진달래 함성제도 우례 없이 적은 인원으로 도리어 눈길을 끄는 기현상이 연출되기도 했다.

4.30 문화제와 메이데이를 기억하고 행사에 참여한 이들은 또 얼마나 되었을까. 다가오는 5.18과 6.10항쟁에는…. 혹자는 20대는 여전히 비판의식을 갖고 사회 진보와 변화를 바라고 있다며 N세대고 충분한 여건이 만들어지면 우리 사회 진보를 위해 싸웠던 대학생의 사회역사적 구실을 다시 맡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대학생들의 무관심을 ‘현 정치판의 부정­부패’때문으로 돌리고 미비한 역사의식을 ‘객관적 방관주의’라 명명하는 궁색함의 연장선상 아닐까. 누군가가 매직으로 눌러 쓴 5.18 관련 커리보다 영어학원, 취업정보 자보가 더 많은 이들의 시선을 잡아매는 오늘날의 현실 앞에, 신록의 푸르름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오월의 캠퍼스와의 그 공존 앞에 다시 한번 메아리쳐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

여러분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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