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마트라에는 직경이 30센티미터에 달하는 라플레시라는 거대한 꽃이 자생한다고 한다.

라플레시아가 살고 있는 곳은 굳이 쟁탈전을 벌이지 않아도 충분할 만큼 온갖 곤충들이 득시글대는 ‘밀림’이다.

그렇다면 이 꽃의 크기는 꽃가루를 위한 생물학적 목적마저도 초월한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채 그저 꽃을 키울 뿐인 것이다.

“아빠 사업이 망했을 때 날마다 빚쟁이들이 집에 돈달라고 찾아와서 진을 치고 있었어요.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우리를 그토록 괴롭혔던 그 빚쟁이들은 모두다 잘 사는 사람들이엇거든요. 우리에게 빌려준 돈을 받지 않아도 될만큼 잘사는 사람들...”한 후배가 담담한 목소리로 이 이야기를 꺼낼때 내가 이 꽃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필요한 만큼 섭취하고 필요한 만큼 사냥하는 ‘자연세계’에서 이 꽃은 하나의 돌출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필요한 만큼을 ‘제외’하고 남는 ‘과잉이윤’이 얼마나 많냐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지금의 인간사회에서는 라플레시아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라플레시아가 목적없이 그저 꽃을 키울 따름이라면 이들은 벌어들인 돈을 쓰기 위해 ‘필요없는’필요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라고 할까. 이제는 본말이 전도돼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필요에 의해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생산’을 향해 모두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잇는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한쪽에서 이러한 일이 진행돼고 있을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최소한의 필요조차 채우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라플레시아가 그 꽃을 피우기 위해 숙주인 덩굴실물의 영양분을 빼앗아 먹듯이. 나의 후배를 괴롭힌 그들은 절실하지 않앗던 그돈을 가지고 무엇을 했을까? 연일 일간지에서 떠들어 대듯이 자식에게 고액과외를 시켜줬을 것인가, 아니면 은행에 넣어둔 채 바라보기만 하며 흐뭇해 하고 있을 것인가. 우리가 경제시간마다 배우는 법칙이 있다.

‘최소한의 비용과 최대한의 효용’.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필요한 만큼의 비용과 필요한 만큼의 효용’이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사회가 아닐까? 이제는 라플레시아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너무도 큰 지금의 현실법칙을 바꿔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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