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게’ ‘살아 있는 나를 느끼는 것’ 대학입학 후 처음 대했을땐 낯설기도 했지만 어렸던 날 들뜨게 했던, 어쩌면 열병까지 앓았었던 것인지도 모르는 표현들. 세상을 배워가면서 보다 실천적은 삶을 살고 싶다는 조심스러운 바램이어지만 그때의 낮은 목소리는 지금, 관념속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다.

X X X X “집모양을 그릴 때 어떤 순서로 그리세요? 흔히들 지붕을 먼저 그리고 두 개 정도의 기둥과 여타의 것들을 그리죠. 하지만 어떤 책에 나오는 목수출신의 죄수는 그런것이 가당키나 하냐는 듯이 당연히 땅을 먼저 그리고 그 위에 집의 기반과 기둥 마지막으로 지붕을 그렸답니다.

매우 단순한 이야기지만 바로 현실에서 체화된 ‘앎’이라고할까 얼마전 인터뷰를 했던 사람이 ‘추상화된 지식, 관념’에 대한 자신의 부끄러움을 내비치며 내게 건넨 말이다.

그 사람앞에서 ‘사람과 사람’으로 마주 대하면서 나의 헐거운 틈새로 무한정한 초라함이 밀려들어왔다.

그 앞에서 나는 내 속을 들킨 것 처럼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조바심이 났다.

취재를 위해 ‘인위적’으로 만난 사람이었지만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간적’인 면들이었다.

물론 지면상으로는 드러날 수는 없었다.

기획의도에 맞는 부분들만이 지면화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학보사 기자로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물론 취재로 인한 만남이지만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마다 참 버겁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의 애달픈 삶의 편린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에도 비닐한장 뒤집어 쓰고 열심히 구호를 따라 외치는, 허름한 전대를 둘러멘 노점상 아주머니들과 매서운 날씨에 삼삼오오 모여 허술한 불을 피오며 손을 녹이고 계시던 철거촌의 주름패인 할머니들. 이곳저곳 다니다 보면 특히 지치고 고달픈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엿보게 된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여러 종류의 군상들을 접하며 자꾸 눈에 밟히는 것은 나의 모습이다.

점점더 확연히 부각되는 것은 아직도 여러겹의 껍질을 벗지 못한채 관념속을 헤매어 다니고 있는 떠돌이의 모습. 현실과 추상사이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살아가는 속에서 턱없이 부족한 ‘나를 키워주는 것은 팔할’은 ‘세상’인 듯하다.

어떠한 관념도 끼어들 틈없는 ‘위대한 일상’을 배울수 있으니까 말이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