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어느 새벽 오싹한 기운이 감도는 검찰청사 화장실. 한 사내가 칼을 쥐고 파르르 떨다 곧 병원으로 후송될 것을 생각하며 침을 꼬올까, 한번, 두번, 세번···배를 긋는다.

소란스러운 몸부림에 다급히 달려온 사람의 외침이 아스라이 들려온다.

'휴우~이제 안심이다.

' 최근 북풍공작 수사가 무르익고 있는 가운데 철통 같기로 소문난 서울지검에서 옛 사무라이의 할복 자살을 방불케 하는 권영해 전 안기부장의 자살 시도가 연출됐다.

자신이 입을 열면 정치권이 깨지고 입을 다물면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화살이 꽂힐 것 같아 자살을 결심했다는데···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건을 자살 기도를 가장한 연극, 즉 '자해'로 해석하고 있다.

엄청난 부정부패를 일삼던 사람들이 몬든 것이 밝혀질 위기에 처하면 매번 부리는 수작이 있다.

마스크·휠체어·퀭한 눈으로 대표되는 정태수 '노인'과 아버지께 죄송스러울 따름이라며 눈물을 내보이던 김현철, 단식 투쟁으로 병원에 입원까지 해가며 벗겨진 머리의 왜소함을 호소했던 전두환··· 이들의 행태는 모두 인간적 고통과 괴로움을 과장해 국민적 동정을 얻어내려 했던 여러 편의 드라마였으며 권씨의 자해 역시 수사에 제동을 걸기 위한 쇼에 다름 아니다.

자신이 음모의 배후라는 전모가 드러나자 윤홍준씨 기자회견건 외 공작전반에 대해선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는 똥고집을 참 드라마틱하게도 표현했으니 오랜 세월 권좌에 몸담았던 경력만큼이나 능숙해진 처세술의 수준을 알 만하다.

정치권 파멸을 우려해 저지른 권씨 자해 소동은 북풍수사를 엉뚱하게도 정치 쟁점화시켰다.

한나랑당이 당내 '북풍 및 언론조작 진상조사위'를 '국민회의 대북 커넥션 진상 조사위'로 개명하는가 하면, 자민련이 '북풍사건 6인 특별 대책위'를 꾸려 국민회의와 협력체제 구축에 나서는 등 수사는 이미 사법 영역에서 벗어나 정치권의 상대파괴공작으로 빗나가고 있다.

이러한 정치 공방 과열은 '기득권이 체제옹호를 위해 개혁진부세력과 무고한 시민에게 빨갱이라는 덤태기를 씌워 짓밞아 왔던' 진상을 규명해야 하는 북풍수사의 범위를 정치권 인사들에 한정시키고 마는 것이다.

구여권의 조직적 맞대응을 불러일으킨 이번 사건은 북풍수사를 정치음모의 연속선상에서 진행케해 왜곡된 정치역사를 바로 잡겠다는 본래 의도를 그르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북풍수사가 또 다시 정치권 이전투구의 쟁점으로 끓어 오르다 잊혀지고 마는 꼴을 지켜보게 될 지도 모른다.

정치가들이여, 그대들이 몰아부친 '빨갱이'들이 분노로 혹은 억울함으로 정국을 지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벌써 잊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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