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권력과 언론간의 유착관계를 다룬 TV 프로그램 방영이 취소됐다.

그리고 대신 청소년 보호원에 간 소녀들의 이야기가 방영됐다.

그 방영을 취소시킨 힘의 근원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그놈’이 아닌가 한다.

그놈이 그놈이니까 내 짐작이 크게 틀리지는 않으리라. 또 짐작컨대 그 방송 제작진을 회유·협박(?)했던 말 중에는 필시 이말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왜 누워서 침을 뱄냐, 털엇 먼지 안나는 언론사가 어디있겠냐, 다 그렇고 그런게 아니냐. 언론은 여기저기 안쑤시고 다니는 데가 없고 그런 언론을 사람들은 무서워하고 욕하고 때로는 박수치기도 한다.

그러나 언론에도 성역은 공공연히 있어 왔다.

모(母)회사나 다른 언론사를 비판하거나 자성을 하지 못한다.

마치 스스로를 반성하지 못하는 동물처럼. 또 다시 얼마전 방송을 통해 자신의 언론사를 비판하던 한 언론인이 그 방송이후 ‘잘렸다’. 아마 그 언론인의 해고 사유는 ‘누워서 가래침을 뱉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리 기자가 양심적인 소리를 질러 봤자 무참히 깨져 나가는 계란 같이 되버리는 것이 현실이다.

내가 학보사 기자로 일하면서 이 일에 회의가 들었던 때중 하나가 ‘내가 기자가 맞나? 이대학보사, 언론사가 맞나?’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다.

아마추어지만 항상 기자답게 행동하기를 스스로 채찍질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은 퇴임하는 날까지 내가 개인적으로 지고 가야할 고민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게으름만이 회의스러웠던 이유의 전부가 아니다.

누워서 침을 뱉는 일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지도, 그래서 이번엔 그 기사를 빼는 것이 어떠냐는 권유, 너네들은 알지 못하고 알아서도 안된다는 훈시, 지금은 때가 아니니 기다리라는 따돌림, 학보 없애라는 사람도 많다는 난데없는 협박까지. 결구 바쁘다고 거절해버려 취재를 할 수 없는 상황과 그 기사를 빼거나 바꾸라는 이런저런 ‘지도와 권유’로 이미 화석이 되버린 소식들을 교정봐서 내보내는 기자 아닌 기계가 같다는 생각은 지독히 회의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그래 이게 학교신문의 딜레마’라며 적당히 포기하고 체념한 사이, 그 사이로 빠져 나간 것들이 이제는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직접적으로 언론매체를 제작하는 사람은 학보나 일간지나 그 독자의 수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수이다.

그러나 그 언론매체가 무엇을 취재해 어떤 목소리를 내는가는 공급자만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요즘 이대학보 왜 그래요?”라는 질책이 아프지만 고맙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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