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있었다.

여기저기 피묻은 상처가 있는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고 팔과 다리는 줄로 묶인 채 인천 부근 바닷가에서 시체로 발견된, 알고보니 장애인이라던 한 남자... 그 남자의 사진ㅇ르 처음 보았을 때, 동시에 겨울철 강제철거 중일어난 의문사임을 알앗을때, ‘이제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나겠구나’라는 생각에 문자 그대로 치열한 ‘투쟁’의 거리에 나선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 겨울, 수업을 마치고 종합과학관을 내려오는 중 같은 과 친구가 그 남자의 사진에 대해 한마디 내뱉았다.

밤에 기숙사 화장실을 갓다가 사진이 붙어잇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무섭게 왜 저런 사진을 붙여놓는지 모르겠다고 순간 흥분한 나는 어떻게 한 사람이 원인조차 모를 죽음을 맞았는데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말했고, 분위기는 금새 어색하게 가라앉았다.

그로부터 2년이 다 돼가는 지금도 한총련 투쟁국장이 검거도중 경찰과 학생 측의 주장이 엇갈리는돌연한 죽음을 맞는 등 그때와 비슷한 많은 일들이 여전히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

이제 바르지 못한 현실 자체가 타도의 대상이 되는 때는 저만치 물러간 듯 하다.

바르지 못한 현실이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한편 사진속의 남자는 이덕인이라는 자신의 이름 뒤에 ‘열사’라는 꼬리표를 달고 많은 집회와 추모제에서 기억되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처음 사진 속에서 만났을 때처럼 내가 사는 이 곳에서 동시대에 원인도 없이 죽어간 또다른 나로 기억된다.

이제 나는 그 친구, 그 때 분위기를 망친 나 모두에 동조하지 않는다.

앎이 곧 실천이 아니라 앎이 자신의 이익과 맞닿앗을 때에 실천되는 지금, 금방 뒤집어질 줄 알았던 그 겨울이 잠잠했던 이유를 알았으니까. 부당함을 느끼지 못했던 친구만큼이나 친구와 내가 닿고 잇는 상황을 설득하지 못한 채 치기를 보였던 내게도 그 이유가 있을테니 말이다.

아니 나에게 더 잇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박노해씨의 ‘사는 데 도움이 안 된다면’중 일부로 대신해 본다.

<이제 의식은 ‘이익’을 통해야 행동이 됩니다/옳은 방향이라도 이익의 다리를 두드려보고야 건넉/사는 데 도움이 되어야만 몸이 움직입니다/ 아무리 좋은 의식도 몸통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내 마음을 울리고 내 몸을 울리는 감동이 없으면 이익에 쫓기는 자신과 현실을 돌아볼 수도 없습니다.

/ 그렇습니다.

의식은 사는 데 도움이 되어야만 합니다/ 진리와 이념은 내 삶에 이익이 되어야만 합니다.

>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