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끼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다지 넉넉치 않은 집안의 나는 스물이 넘어서도 새 구두를 사러가지건, 부ㄲM러움이라 할 수 없는 긴장감에 싸인다.

헌구두에서 사야 할 새구두로 발을 옮길때 , 다 떨어진 구두 속을 남에게 보이기가 너무나 두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중학교 소풍 때, 단무지만 든 김밥을 다른 친구들처럼 앞에 내놓고 먹을 수 없어 저만치 떨어져 울고 있던 반아이의 마음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화의 시대’라고 불리는 우리 시대에, 가난은 운동화가 있는가, 없는가가 빈부의 기준이었던 너덜너덜한 검정고무신 시대와 또 다르게 존재한다.

소유하고 있는것이 낡으면 새것을 사는 단순한 진리가 통하지 않고 ‘일용품’을 넘어 ‘ 스타일·패션’이 중요시 되는 풍요로움이 넘치고 있기 때문일까. 있음/없음으로 나뉘어 표현됐던 빈부격차는 이제 ‘취향도 계급’이라는 말에 걸맞게 세분화된 ‘있음’들 사이에서의 상대적인 빈곤으로 대체된 듯하다.

그러나 결국 아무리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해도 세계화된 자본은 어딘가에 굶어 죽어가고 있는, 또한‘빈민’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어감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한편 취향·패션의 ‘차이’가 귀티나지 않는 취향·패션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움 아닌 부끄러움으로 남는 것마저 점점 자신의 헤게모니를 견고하게 다져가며 일상을 지배하는 자본의 또다른 모습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은 취향의 차이가 재산소유의 차이라 생각하고 남과 견주어 부끄러워 하는 것같다.

그러나 같은 사회에서 살기에 긴밀하게 연결돼 같은 모순을 겪어내는 우리가 먼저 해결해야 할 부분은 다양한 스타일을 추구할 수 있는 넉넉한 삶이 아니라, 살 집·먹을 음식·입을 옷을 걱정해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다.

오늘 내가 향유하는 풍성한 ‘문화’가 다른 사람이 당장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경제’를 착취함에서 비롯되는 사회를 바꾸고 싶은 나의 마음은 낡은 구두를 부끄러움 없이 멋어보고 싶은 작은 소망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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