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권력을 가졌더라도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최루탄을 쏠 것 같다.

권력이라는 것이 그렇잖아. 쥔 사람은 놓지 않으려하고, 거기에 맞는 이데올로기는 교육을 통해 자꾸 재생산되고’며칠 전 동기가 했던 말. 과연 파워엘리트가 확고부동한 권력을 쥐고서 그들만의 결단으로 세상을 조물락거리는게 당연한 것일까?라는 통설적 의문이 고개를 든다.

요즘 아이에서 어른까지 나라 걱정을 하고 있는 양상을 보면 냉소주의 또는 숨겨진 엘리트주의로 귀결되는 듯 하다.

억압적이긴 하더라도 안정적이고 신화를 이뤘던 과거에 대한 향수. 그리고 군주의 현명함을 그렇지 않은 대중에 비해 강조하며 정복·파워혁명의 배경을 깔고 잇는 소설 열풍이 그러하다.

파워와 엘리트에 관해 최근 모대학신문에서 본 ‘명문대생’인식조사 설문에서 ‘우리나라에 명문대학이 아직도 존재해야하느냐’는 질문에 반수가 넘는 응답자가 긍정을 햇으며, 그 이유로 선도적·진보적인 역할을 담당할 지식인의 유효성이라 햇던 것을 본 기억이 있다.

그렇다.

바로 대학은 사회에서 가장 진보적이고도 사회변동에 민감하게 개입할 힘을 가진 동시에 계급간의 이동을 가능하게 할 유력한 배경이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대학의 처음 설립취지가 국민국가체제에 아주 잘 들어맞는 ‘훌률하고 보수적(자주‘보편적’이라고 불리우는)인’시민 배출이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가장 진보적이면서도 동시에 보수적일 수 있는 우리시대 엘리트의 양면성과 대학은 참으로 닮아있다.

기실 엘리트라는 개념은 굳이 똑똑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짓는역할론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필연적으로 ‘이끌어갈’집단과 안존 이데올로기에 ‘이끌려갈’사람을 전제해야 한다는 유혹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선도적으로 세상을 ‘이끌어갈’소수 상위 20%의 무리에 들어가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을 받는 고2의 남동생을 보며 명문대와 엘리트의 이중성, 그리고 진보의 힘이란 진실로 어디에서부터 뿜어나오는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무거운 동생의 가방 뒤로 친구가 야학에서 가르치는 열여덟의 ‘어린제자’가 쥔 깃발을 보며 이끌려가지만은 않을 우리를 생각한다.

야학이라는 깃발 아래 작년 겨울 노동법 날치기 규탄집회에 참가해 세상이 권력을 쥔 자들에 의해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며 세상에 반응하는 아이는 일류집착증과 배타적 계급상승이 아닌 모두의 힘으로 바꾸어 나갈 세상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