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이다.

국가 기념일로 제정돼 17면전 광주의 아픈 상처가 조금이나마 달래지지 않을까하는 생각 한켠으로, 2년전 5·18이 내게 던져준 것을 돌이켜 보았다.

학보사에 들어온 후 나는 “다 그렇죠, 뭐”라는 체념적인 말투를 자주 써 선배들께 “넌 왜 그렇게 냉소적이니?”라며 한번 혼난 기억이 있다.

그러나 사실 수습때 남발(?)하던 그말은 냉소의 의미보다 실망스런 상황에 대한 방어적 성격이 더 강한 것이었다.

1990년대의 절반에 대학을 들어온 나는 시대는 충분히 벗어났지만 그렇게 큰 운동을 만들어낸 세대에 대한 막연한 감동을 가지고 있었다.

‘잔치는 끝났다’고 말하는 모 시인의 말처럼 80년 광주를 시발로 해 일어난 모순과 저항을 ‘끝났다.

’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아쉽다고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과거를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생각한 나머지 현실의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로인해 현재의 가능성에 대한 여지를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모순을 얘기하는데 그것을 들으려는 사람들은 없고, 그래서 늘 학내 행사나 집회에서 하는 ‘얘기’보다 모인 사람의 ‘머릿수’가 내게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95년 5·18동맹휴업 취재를 맡게된 나는 예의 “동맹휴업을 누가 해요? 총투표도 얼마 안할 걸”이라며 또한번 나 자신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여지조차 주지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어줍잖은 나의 방어막은 동맹휴업 당일 이화광장을 메운 이화인들을 보면서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결코 이화인의 많은 ‘머릿수’문제가 아닌, 현실의 저항에는 뒤돌아 앉아 과거 지향적인 퇴행을 거듭하고 있던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었다.

5·18은 과거가 아니며 바로 그 순간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는 사람들의 평가만을 기다리며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과거의 결과물들을 ‘현실’속에서 남아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재생산 해내느냐가 중요한 것음을 나는 너무 뒤늦게 깨달았던 것일까. 이제 과거가 나에게, 나의 시대에 남긴 것들을 차근차근 모아야겠다.

그것이 시대에서 떨궈져 나온 이의 항변이 아닌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임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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