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동포돕기 모금운동이 학내 곳곳에서 활발한 요즈음 5일(화) 학관 507호에서 열린 ‘북한의 실상과 북환동포돕기의 의의’강연을 맡았던 임종석씨. 그가 대학을 다니던 때는 군사독재가 횡행하던 80년대 후반이었다.

“1학년때는 입시에서 해방된 기분에 아무것도 모르고 신나게 놀던 날라리 학생이었어요. 하지만 교련교육 거부, 열사들의 분신자살을 지켜보며 무언가 크게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아마도 사회위기 속에서 대학생의 위치를 처음 고민해 볼 기회를 가졌던 것이리라. 그후 그는 “소리개벽”이라는 노래패 활동을 통해 사회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데. 알아도 말 못하던 그 암울한 시절, 그는 전대협 3기 의장으로 선출된 후 임수경씨의 방북을 주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전국 지명수배를 당하기도 했단다.

그 와중에서도 경찰망을 피해 11번의 기자회견과 집회연설을 하기도 해 ‘홍길동’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는데. “경찰과 숨바꼭질 하듯이 제가 요리조리 잘 피해다니니까 시민들도 모두 신이 났었나봐요. 아마 그건 공안당국에 의해 짓눌려 있던 당시 사회속에서 그런 저를 돌파구의 상징으로 여기셨기 때문일겁니다” 이러한 활동때문에 그는 때를 넘겨 어느새 80년대에서 90년대로 시대가 바뀐 지난 95년에서 겨우 졸업을 할 수 있었다.

“80년대와 90년대는 문민정부가 들어섰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90년대의 사회모순을 풀어내기 위해선 세상을 자기의 관념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변해가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겠죠”라고 말하는 그. 그는 시대에 따라 변해 온 지금의 학생들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90년대의 학생들은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도가 많이 떨어진 것 같아요. 생활이 윤택해 지면서 자기진로, 자기여가에 관심가지게 된 것은 좋지만 공동의 문제를 외면한다면 결국에는 자신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합니다”그래서 그는 실무적인 일에 매몰돼 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역이면서도 학생들보다 더 사회문제에 멀어질 수 밖에 없는 20∼30대 직장인들이 함께 고민하고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공간인 ‘청년정부문화센터’라는 곳에 몸담고 있단다.

“우리나라의 미래는 젊은이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얼만큼 실천해 나가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실천분위기를 하나의 문화로 정착시킬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라고 의지를 밝히는 임종석씨. 사회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는 그 순수함. 오늘도 곳곳에서 강연과 북한동포돕기 캠페인 등으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을 그를 생각하면 우리가 바라는 새로운 사회가 그리 멀지만도 않은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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