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겨울바람이 채 가시지 않앗던 지난 2월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법적 으로 금지된 겨울철 강제 철거로 목수을 잃은 한 아주머니의 장례식을 앞두고 진행된 경기도청 항의방문 취재. 50명 나짓될까. 허름한 잠바차림에 주름진 얼굴의 아주머니, 아저씨들의 갈라진 목소리가 철거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전부였을 뿐, 최루탄도 강경진압도 없었던 그 조그만 집회에서 이빨을 부딪치며 덜덜 떨고 있었던 학생기자... 두번째 경선이라는 제5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의장 선거는 오가는 말이 많았다.

위기라는 90년대, 학생운동의 방향성을 고민하며 무성했던 논의에서 각 후보의 견해차는 드러나지만 누구를 위한 운동인가라는 기본적인 부분은 공유하고 잇는 듯 하다.

‘민족’이라는 이름이 ‘노동자’라는 이름이든 부패 정권과 재벌경제라는 수레바퀴밑에서 신음하는 ‘민중’을 위한 사회를 지향한다는 전제. 실천 형태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 이러한 논리에 크게 이의를 제기할 대학생은 별로 없을 것이다.

짧은 민주주의 역사속에서 현상을 그대로 수용하기에 익숙한 우리사회. 상대적으로 진보적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자율성이 어느정도 허용되는 대학. 그래서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부와 권력의 편중으로 인한 ‘민중’의 괴로움에 대해 주로 얘기할 수 있는 것도 대학생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학생 중의 하나로 기사로써 ‘민중’과 함께 하면서 잔뜩 겁을 집어먹었던 기억. 돈도, 비빌 언덕도 없는 그들의 초라함에 나는 위축됐던 거싱다.

그것은 ‘대학생들에게는 공권력도 함부로 못하지만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이라고 나도 모르게 재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대학생이라는 사실만으로도‘수레바퀴위의 세상’에 속해 있는 ‘나’는 어쩌면 ‘민중’을 나와 구분짓고 나의 정의감을 위한 대상으로 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민중’데 대한 믿음이니 애정이니 하는 것들은 ‘민중을 위한다는’의식이 빚어낸 환상이었던 것은 아닌지. 그러나 이 사회의 진실에 처음부터 고개를 돌려버리지 않았던, 그래서 자신의 이중성을 고민하게 된 것이 대학생다움의 진실로 나악는 하나의 길이라 믿고 싶다.

그리고 그과정에서 대학생인 각각의 ‘나’는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진정으로 민중과 ‘함께하기’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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