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쌀쌀한 날씨인데도 돗자리 하나만 펴고 농성하는 노동자 분들이 정말 안돼보였어요”직업병으로 유명해졌던 원진레이온 취재를 다녀온 후배의 말을 듣고 늘 나를 씁쓸하게 했던 ‘취재후의 감상’이 떠올랐다.

철거촌 취재가 유난히 많았던 나는, 철거깡패에게 맞아 임신 9개월의 아내가 다치고 코뼈가 부러진 철거민 아저씨를 만났을때나 철거민들의 임시 가건물이 사제폭탄으로 불타 없어진 돈암동 산동네를 갔을 때나 늘 비슷한 생각을 했다.

‘돈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에 대한 ‘욕지거리’.그러나 그와 함께 ‘안됐다’는 감상이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그들을 그렇게까지 내몬 상황에 울분을 느끼며 ‘그들의 현실을 이해하고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다’라는 오만한 생각을 하게 됐던 것은. 몇달 후 또 다른 철거 예상 지역을 취재갔을 때 나는 비슷한 감상을 가지고 그분들을 대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다음 ‘철거가 시작됐다.

급한 상황이다’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이미 저번주에 기사화 했는 걸....”이라며 나는 미적거리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철거’라는 절박한 현실은 나에게 있어 ‘이해’의 대상이었을 뿐 절실한 그 무엇이 아니었고 나는 단지 일회용 소비품마냥 그 감상을 꺼내보곤 했을 뿐이었다.

타자화와 그 어줍잖은 감상속에서 나는 오히려 비인건적인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의 일상은 굳이 사회에 대해 욕지거리를 할 필요도, 감상을 갖을 필요도 없다.

그저 주어진 위치대로 살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한번쯤 그 ‘주어진 위치’가 나의 자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 그 속에서 나타나는 불평등이 태상적인 것으로 돼버리는 현실에서 우리는 그러한 모순된 구조들을 타자화 시켜 바라보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여지껏 나도 모르게 나눠 버렸던 현실은 ‘나’나 ‘그들’이 아닌 ‘우리의 현실’로 인식하기까지 앞으로도 나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감상만이 아니라명 그 착오의 벽들이 그리 높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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