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동생은 자폐아야...’로 시작되는 편지를, 몇 년전이었던가... 당시 가장 마음을 주었던 벗에게 보낸 일이 있다.

다른 반이어서였을까.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친 그 애 눈에서 결코 공존할 수 엇ㅂ는 두 세가지 감정들이 함께 읽혀진 건, 그리고 다신 그 눈조차 보지 못했음을 어쩌면 마음의 다른 한편에선 각오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이후 몇 번, 몇몇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건넸고, 내 이야기가 다른 이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성급한 일반화 속에 결국 나는 아주 오랫동안 아무에게도 이야기 않겠다고 결론을 내렸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건네받은 사람 중엔 간혹 자폐아의 정의를 물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열아홉이 다 된 지금까지 병원에 간 적이 없어 혹은 자폐아가 아닐지도 모를 커다만한 내동생은 행복한 ‘가판대 주인’같다.

한평 남짓한 부스 안에 손이 닿는 주위를 빙 둘러 온갖 물건을 빼꼼이 쌓아놓은, 동생은 그 안에 앉아 한없이 방긋 웃는다.

.. 그애에게 우리의 세상은 어떤 빛일까. 다른 이에게는 한걸음 나아갈 것도 없이 꽉 막힌 가판 안에서조차 그 아인 자신만의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

언제나 맑게 개인 가을의 푸르름으로. 교과서와 지우개에 못된 말을 쓰고, 가방끈을 자르고, 치마 속을 들춰보고...열 너덧 먹은 아이들은 거칠 것이 없다.

그러나 동생은 자신을 둘러싼 행위들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좋지 못하다는 것을 모르는 탓에 ‘안돼 ’하지도 않는다.

그 애에게 사랑하는 남녀가 손을 잡는 것과 같은 반 남자애들이 자신의 손을 잡는 것과의 차이는 가장 납득하기 힘든 것 중의 하나일게다.

날이 점점 따뜻해져만 간다.

시간이 흐름이 급속히 느껴지고...여름풀이 자라듯이 움찔움찔 동생의 몸이, 마음이, 낯설게 변해간다.

동생이 스스로 바깥 세상에 제 마음을 열었을 대, 그 가이 세계의 상싱으로도, 그 어느 세계사람의 상식으로도 납득 가능한 그런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그곳이 동생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식적인’세상일 땐, 거기 일간지에라도 동생의 이름을 거리낌없이 올릴 수 있게 되겠지. 그 때까지만, 꼭 그 때까지만 동생의 이름을 그냥 ‘동생’이라 남겨두겠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가끔, 아주 가끔 동생이 태어나지 않음을 가정해보던 이부끄러운 언니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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