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방학은 시공간의 무제학적인 자유가 허용되는 기회다.

그러나 학보가 나오지 않는 방학임에도, 기획을준비하고 교육을 받아야 하는 기자인 나는 여행도 아르바이트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방학하면 기억에 남는건 영화보기 뿐이다.

많은 영화를 봤지만 특히 마음이 심란할 때면 ‘삭박한 이 시대의 외로운 휴머니스트, 따스하고 진한 감동을 전합니다’라고 선전하는 류의 영화에 몰입했던 것 같다.

자본주의 사회안의 휴머니스트를 다운 어느 회사원의 이야기,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백인청년과 그를 따르는 흑인들의 삶을 다룬 영화 긍. 그것이 사회의 공정한 변화를 말하기는 커녕‘그런 사람’의 존재로 일시적인 위안감을 줄 뿐 이라는 것을 알기에 친구들과의 토론에서 값싼 휴머니즘이라고 일축했던 영화들. 그럼에도 스스로 찾아들어가 값싼 하룻저녁의 미소를 지었던 건 영화를 ‘바라보기’에만 안주했기 때문이 아닌지. 한때 사이비 평론가 같았을 지라도 영화속에 담긴 사회적 함의에 대해 지껄이던, 영화를 보고 ‘무엇’을 얘기하고 싶어하던 ‘나’는 더이상 없다.

무수한 논쟁과 고민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회와 사람들의 갈등에 지친 나머지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영화속의 삶에 젖어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현실로 돌아와 접하게 된 시국선언, 총파업, 한보사태… 기자의눈으로 3대 일간지를 비교하며 열을 올리는 나는 문득, 신촌의 네온싸인이 하나 둘 켜질 무렵이면 영화속의 삶으로 빠져들곤 했던 ‘나’를 되돌아본다.

후배들을 데리고 찾아간 취재현장인 여의도 광장에서 어린 아들을 어깨위에 앉히고 매서운 북풍을 맞던 젊은 노동자를 생각한다.

한보사건의 재수사를 촉구하는 시민들의 움직임도, 그들은 한 목소리를 냄으로써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현실의 삶을 잊고 영화속으로 들어가고자 했던, 그러나 결국 들어갈 수 없음을 깨달은 현재의 ‘나’는 이제 개인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또다른 ‘나’에게 외쳐본다.

현대 사회의 범람하는 매체와 담론 등 개별화된 ‘나’를 조장하는 것들을 궤뚫어 보자고. 현상에 젖어드는 ‘나’아 아닌 사회속에서의 ‘우리’를 얘기할 수 있기위해. 그러면 영화중독증 환자의 영화읽기는 세상읽기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