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이다.

다섯살박이 사촌동생의 그림책을 넘기다가 무지개 그림을 발견한 것은. 아주 오랜만에 본 무지개 그림이었다.

스물 두 해를 살면서 나는 아직까지 무지개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래도 난 내가 여태 무지개도 한 번 못봤을 만큼 억세게 운이 나쁜 놈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다만 먼지로 두겹세겹인 하늘을 뚫고 서울촌놈의 눈 앞에 나타날만큼 무지개가 강력(?)한 놈이 아닌 모양이라고 위로해왔었다.

“지윤아, 너 무지개 본 적 있니?” 무심코 지나가는 말로 나는 다섯살박이에게 묻고 있었다.

“응, 비오는 날 우리집 앞에 나가면 몇개 씩 있는데, 뭐” 무슨소리일까… 저나 나나 아파트촌에 사는 건 마찬가진데 얘네 동네는 비올 때 마다 무지개가 뜬다고? 아니 근데 무지개가 몇개씩 있다는 건 또 뭐지? 쌍무지갠가? 나는 집요한 추궁끝에 기어코, 그 궁금증을 풀고야 말았다.

꼬마가 본 것은 무지개가 아니라 바로 콘크리트 바닥에 흘러나온 자동차의 기름띠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웃어야 할 그 상황이 별로 우습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것은 회색 콘크리트 바닥에서 무지개를 찾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가엾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빗물에 둥둥 떠 있는 기름띠를 무지개라고 우기는 꼬마의 모습에서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한다고 믿는 것, 그래서 내가 보지 않은 것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쉽게 빠져다는 방식이다.

혹시 내 안에만 빠져서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어떻게 신문들 마다 똑같은 걸 가지구 이렇게 다른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진실은 하나일텐데 말야. 도대체 누구말이 맞는건지…” 그건 아마도 저마다 세상의 서로 다른 면을 바라보고 이기 때문일거다.

그래서 말하는 부분도 제각각 다른 것일테고. 나에게는 보이는 부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수 있고, 그래서 난 내가 본 것들을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나는 우습게도 마치 떼를 쓰는 아이처럼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하늘을 뚫고 나오지 못하는 무지개처럼 단지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뿐이다.

내가 꼬마를 보며 가엾음을 느꼈던 것은 그것을 말해주고 싶지만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나도 아직 무지개를 보지 못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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