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모 청바지 업체에서는 사람의 귀와 눈, 입을 컴퓨터 합성한 이미지 광고를 선보였다.

‘청바지 광고’하면 으례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활동파 연예인을 등장시켰던 기존의 광고형식을 벗어나 그같은 광고를 제작한 것은 ‘소비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시도였다고 한다.

이제껏 보여주기 식으로 흘렀던 광고도 이제는 소비자의 반응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하는 번거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것이다.

이처럼 민주와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사회에서 커뮤니케이션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기제로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소통을 가장 강조한느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개인과 개인, 단체와 단체들간의 소통이 부진하다는 점이다.

하나의 옷감을 짜기 위해서는 씨줄과 날줄을 번갈아 엮어야 하듯이,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양측이 보조를 맞춰야 한다.

내가 의견을 개진하면 다음에는 상대의 의견을 듣는 과정이 필요한 것은 대화함에 있어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다들 잘난 사람만 살고 있는 듯 저마다의 목소리만 내기 바쁘다.

자기의 목소리는 들을 수가 없고, 또 들어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우리는 때때로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벽창호 같은 사람을 본다.

마치 벽에 대고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분명히 그가 나에게로 마음을 열고 응답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에만 함몰돼 있기 대문일 것이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론에서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뤄지기 위해서는 민주적이고 비판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여건이 필요하다고 했다.

곧 나의 열린 마음과 상대의 열린 마음, 서로의 마음이 열려있다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같은 여건이 마련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만 낼 때 나와 너가, 남성과 여성이, 기업과 노동자가, 정부와 국민이 소통하지 못한채 불협화음만이 계속될 것이다.

요근래 일어난 교원·학생과 정부 사이의 교육개혁 움직임, 한총련 사태, 한의대생 집단 제적사태 등 일련의 사건들은 소통의 부재를 실감하게 하는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들은 계속 소통하지 못하는가? 왜 각자의 목소리만 내고 있는가? 과거 한편에서는 윽박지르고 억압하는 역할, 한편에서는 무력하게 수그러져야 하는 역할이 강요되던 소통 없는 시대가 있었다.

이제 그 시대가 지나 소통이 가능한 시대라고 믿었던 건 단지 착각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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