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전복·도전·공격·진보·해방.... 이 단어들이 공통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기존질서에의‘일탈’일 것이다.

한여름에 부츠를 신고 돌아다니는가 하면 머리를 파랗게 물들이기도 한다.

귀걸이를 짝짝이로 하는 건 기본이고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 다 큰 처녀가 배꼽을 드러내놓고 다닌다.

물론 이런 것들도 일탈이라고 할 수 있다.

남과 다르기 위해 여유있게 시도한 일탈. 그러나 우리는 언제부턴가 ‘반동일’이라는 개념만으로 일탈의 영역을 메우고 있다.

우리는 튀고 싶고 욕구를 분출하고 싶다.

그래서 배꼽도 보여주고 발에 땀띠가 나도 부츠를 고집한다.

그러나 그뿐이다.

끊임없는 ‘차이’와‘동일’사이의 왕복행위일뿐 그것만으로 내가 불평등하는 현실이 변하지는 않으니까. 작년 이맘때쯤이었을까,제이모임을 만든다는 대학신문광고와 함께 동성애자들의 커밍아웃이 시작되면서 사회는 동성애에 대한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남자가 남자를?’‘여자가 여자를?’이것이야말로‘이성애’라는 보편적 진리를 위배하는,그리고 가족제도 자체를 흔들어 놓기에 충분한‘반란’이었다.

그렇다면 이것 또한 완벽한‘일탈’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부로부터 출발하더라도 그것이 번회를 이끌어내는 에너지로 전환하는가, 아니면 일시적이고 외형적인 저항에서 끝나는가. 일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님을 알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다.

자칭 진보적인 집단이라는 대학에서, 그 안에서도 더욱 진보적이닉는 요구(?)받는 기자역시 마찬가지이다.

동성애 기사를 쓰면서, 집회기사를 쓰면서 끊임없이 억압받는다.

윤리와 규범과 안정이라는 미덕(?)을 강요하며 무언가에 대해 반대하고 뛰쳐나오고 비정상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두렵게 만드는 사회. 그안에서 우리는 과연 거침없는 일탈은 꿈꿀 수 있을까? 이제‘생소함’이라는 외형적 측면이 아닌‘저항의 생산’이라는 현실적인 지점에서의 일탈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권위에 대한 반항일 수도 있고 제도와 규범과 관습에 대한 파괴적 일탈일 수 도 있으며 나아가 권력과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일 수도 있다.

일탈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변화를 위한 투쟁의 출발점이자 새로운 안정을 위한 과정이다.

행위하고 발화하는 과정에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어떤 것,그것이 진정 일탈고 파괴의 미학임을 안다면 자, 지금부터 반란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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