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이 말하는 이상적인 국가의 근거가 되는 정의의 내용은 각자가 자기의 것을 갖고 스스로의 의무를 행하는 것이다.

학생은 학생답게, 정치인은 정치인답게… 이렇듯 우리는 일상에‘∼답게’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얼핏보면 나무랄데 없는 좋은 말이지만 무책임하게 갈라놓은 학생답게 / 정치인답게 / 군인답게 라는 경계로 인해서 상처를 입는 일도 종종 있게 마련이다.

이전까지‘학생답게’라는 말을 들을때부터 공부 열심히 하라는 소리쯤으로 치부해버렸던 우리의 한계. 대학생이 된 우리는 아직도 그 문턱에서 해방될 수 없는 것인가. 혹자는 대학을 순수학문의 전당이라는 대전제아래 사회의 한쪽 구석으로 밀어내려 한다.

이렇게 사회적인 위치를 구분하려 드는 이들은 대학생들이 사외희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 이렇게 말하곤 한다.

‘너희들은 공부나 해라!’라고. 이 사회에서‘∼답게’ 살아간다는 고민을 하기전에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겨두고 학생은 공부만 해도 될만큼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제몫을 다하고 있는지 먼저 묻고 싶다.

그리고 왜 학생만 학생답기를 강요받아야 하는 것인지도. 최근 성공한 쿠데타도 단죄된다는 것을 지켜보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새로운 감회를 맛보았을 지 모른다.

또한 그토록 값진 결과를 얻어내기까지 광주항쟁, 6월항쟁 등 역사의 격랑속에서 부당한 사회 구조에 맞서, 뒤집어진 상식들을 바로 세우려 했던‘작은 영웅’을 더올려 보았을 것이다.

그러한 투쟁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학생들은 왜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거리로 나왔던 걸까. 나라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학생운동을 합리화시키려 한다고 속단하기는 어렵다.

여기서 우리는 이상적으로 보이는 분업의 뒷면에는 학생과 노동자를 하나의 역할에만 가둬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아노딜 것이다.

‘∼답게’라는 단어를 너무나 쉽게 말하는 우리는 그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당위명제 뒤에서 뜻하지 않았던 의도들과 만나게 된다.

‘농사일을 모르는 목수에게 농사일을 맡길 수 없고 목수일을 모르는 농부에게 목수일을 맡겨버릴 수 없다’는 식의, 단순한 기술적인 분업과 복잡한 사회적인 분업을 동이라는 잣대로 재고자 하는 반민주적인 국가관을 말이다.

이제 분업의 장점만을 파악했던 플라톤에게 맹공을 퍼붓겠다.

인간의 능력은 전문성을 포함하여 다양하게 개발되야 한다.

생산에 종사하면서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고 정치에 종사하면서도 생산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란 어떤 특정한 엘리트 집단의 독점물이 되어서는 안되며 길거리를 청소하는 사람도 정치가가 될 수있는 가능성이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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