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3월3일: 국제축연맹(FIFA) 사무총장 공동개최 불가 발언/ 95년 7월 11일: 김윤환 한일의원연맹회장, 공동개최 제의/ 95년 7월19일: 정몽준 축구협회장 공동개최 반대 공표/ 96년 4월: 공노명외무장관, 공동개최안 수용의사 피력/ 96년 5월 21일: 가와부치 일본유치위 부위원장, 공동개최 가능성 발언/ 96년 5월23일: 안드레아스 FIFA대변인, 공동개최 대비 FIFA정관 개정가능성 시사 “세계 최초로 월드컵이 한·일 양국에서 개최될 것입니다”FIFA의 아벨란제 집행위원장의 발표문이 낭독되는 순간 국내는격랑에 휩싸이게 됐다.

95년 9월 FIFA에 유치 신청서를낸 후 한·일 간의 월드컵유치 ‘차선’의 카드였던 공동개최라는 결과물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가 과연 양국의 성과물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유치 결정이 내려진 스위스 현지 관측통들ㅇ 사이에서는 ‘전리품을 챙긴 쪽은 FIFA 집행위원들로, 그들이 승리자’라는 촌평이 나오기도 합니다.

양국의 혈전을 방불케하는 유치전략에도 불구하고 유치홍보가정에서부터 결론까지 왠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2002년 월드컵 개최지 결정은 FIFA내 유럽축구연맹과 아벨란제 세력간의 권력다투 양상을 강력히 보였다.

이에 각각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국과 일본은 두 세력 가운데 한 쪽을 선택하게 됐고 결국 두 나라의 유치경쟁은 아벨란제 대 바빌란제 세력의 대리전이 돼버렸다.

결정일을 얼마 앞두고 나온 유럽축구연맹의 강력한 한·일 공동개최 주장은 표면적으로는 ‘양국의 지나친 유치경쟁 우려’라는 명분을 내걸고 새로운 국면을 형성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2006년 월드컵의 유럽국가내 공동개최를 노려왓던 유럽축구연맹과 22년간의 독주를 유지하려는 아벨란제 위원장이 일대 교섭을 벌인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정황들이 공동개최 결정과정에서 한·일간의 복잡다단한 문제가 얼마나 신중히 고려됐을지 의심스럽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국내에서 지금까지 진행되어 왔던 유치열기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남의 탓만 할 문제는 아니다.

언론들을 선두로 해서 거의 연일 홍수를 이루던 월드컵 관련 내용들과 무심히 되뇔 정돌 귀에 익어버린 ‘월~드컵 코~리아’식의 홍보로고송들. 그러나 그 달궈진 쇠와 같던 국민적 열기 속에는 16개의 개최후보도시의 재반건-전용경기장 하나없는 부실한 경기시설, 숙박 및 교통문제, 국제 통신문제 등에 대한 고민과 준비의 목소리는 빠져 있었다.

월드컵 코리아를 외치는 사이 전·노공판에 대한 관심도 각종 정치적 비리도 금새 뒷전으로 물러나 버렸다.

‘서울올림픽의 성곡적 개최를 위해’라는 말이 무소불위의 ‘마패’구실을 했던 것처럼. 이렇게 이제 스포츠는 단순히 ‘스포츠’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느새 경제·정치적으로 무서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마법의 요술봉이 돼버린 것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마법에서 우리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동안 어두운 골목으로 내몰려 버렸을 산적한 현안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의 애국심은 하나의 경기에서 우리나라가 이기고 지는 정도를 넘어 지금의 스포츠 이면에 놓인 각국의 이해전략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쪽으로 발휘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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