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자리 쟁취하는 그날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플랜카드가 힘차게 내걸린 골리앗.그 아래 철대문의 벨을 누른다.

내리쬐는 뙤약볕,한낮에도 껌벅거리는 가로등, 빨랫감이 널린채 허물어진 가옥,미로같은 골목골목을 헤메다 다다른 전농3동 철거대책위원회 사무실. 28일(화) 대동제에서 수학교육과와 연대장터를 여는 전농3동은 94년 9월 재개발 지역으로 사업시행에 들어간 이후 철대위를 형성, 현재까지 42가구가 모여살고 있는 곳. 재개발 공사중 임시 주거지인 가수용단지 확보와 영속적인‘삶의 자리’쟁취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작년 7월 대대적인 강제 철거때 학생들이 고생을 많이 했죠.맞기도 하면서 같이 철거깡패들을 막았구요.그런데 상황이 안좋다보니 연대의 의미를 공유하기보다는 학생들이 몸만 대주는게 아닌가 해서 가슴이 아팠어요”라며 지속적인 연대를 위해 학교를 찾아다녔다는 이가 전농3동 철대위 연대사업부장을 맡고 있는 원지희씨(38세)다.

연대사업의 일환으로 연대장터를 살리고 싶다며“지역을 알려내고 결합하는 학생들과의 돈독한 정도 쌓고 학생,주민 서로가 배우는 자리”라고 말하는 그.대학생때만 해도 데모에는 관심 없었고,2년 전만 해도 두아이의 엄마로 단란한 가정속에서 살림밖에 모른던 이였으나,강제철거를 당하면서 민중의 삶을 고려않는 정권의 실체를 알게 됐다고. 가족의 생존과 행복을 위협하는 이들과 싸우면서 유치장에 끌려가도 무섭지 않았으나 정작 마음아팠던건 이기잡단,빨갱이 집단으로까지 바라보는 이웃의 시선.아이들의 놀림에“엄마, 우리는 왜 돈이 없어서 철대위 해”하며 울던 아이가“그래, 나 철대위다.

우리 엄마,아빠는 정치를 하는 거야, 잘못된 것 바로잡는 거야”라고 말할때 가슴아픈 것도 이겨낼 수 있었다는 원씨. 저녁식사후 오손도손 TV 를 보던 2년 전이 그리울때,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그는 이제는 철거뿐아니라 노동,5.18,노수석군의 죽음 등이 ‘자신의 문제’로 여겨진다고.그래서 추모제며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그는 학생들 힘빠지지 않게 하려고 유달리 씩씩하게 행동하는 그이지만 전농동에서는 소문난 울보아줌마다.

여러 아픔을 같이하며 살아온 2년.이제는 설령 거주지가 안정된다 해도 가정에 안주하기보다 활동을 하고 싶다고 한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을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학생을 비롯한 여러 활동가와의 대화를 통해“내가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내 위치에서 할일을 안하면 정권이 그 한사람 몫만큼 비리를 저지르지”라고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는 원씨는 가수용터를 닦아놓았지만 언제 마음변할지 모르는 재개발 회사측과 공권력에 맞서‘자신이 서야할 자리’를 찾았다.

이제 그 자리를 학생들과 함꼐하는 과정으로 연대장터를 연다.

여러 연대 장터때마다 학생들이 철거에 대해 모르면서도 열심히 도와주고 연대가 왜 필요한 것인지를 배워갈때 힘을 얻는다는 그는 “단지 하루의 경혐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후로도 철거지역을 찾아오고 사회의 모순,사람들의 고통에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한사람 한사람의 힘이 어우러져야 좋은 세상이 하루라도 빨리 오지 않겠어요” 공부방에 참여하며 스스로 커가는 이이들을 볼때 ,열악한 환경에서도 건강한 웃음을 잃지 않고 학교생활 잘하는 건 엄마, 아빠가 옳은 일 하고 있다는 믿음때문일거라는 주민들의 말처럼 이들은 서로를 믿고 있기에 초조하지가 않다.

“야가 우리‘투쟁이’야, 철대위가 출범하던때에 태어난 철거둥이지”포동포동 살이 오른 아이가 아주머니들의 따사로운 눈길을 아는지 배시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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