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이란 멋진 의미였다.

정말 그랬다.

만화에 나오는 멋진 표정, 화려한 대사는 아니어도 그 비슷한 분위기에 상기돼 으쓱해사던, '네'하지 않고 '왜요?'라고 묻는 것에 은근히 우쭐해하던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가슴 졸이고 치뤄낸 사건들은 실상, 학생이란 이유로 제약받는 몇 가지를 제자리에 옮긴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마이너스가 아닌 원점에서 고민할 수 있는 순간이, '뭐가 이래!'라 말하지 않아도 될 사회가, 당당할 수 있는 미래가 그리웠다.

폐쇄당한 굴레에서도 이처럼 눈을 크게 뜨는데, 마음껏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이 온다면 얼마나 삶이 후끈거릴까상상하며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은 생각만큼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게 왜요?'라말하다 두들겨 맞던 고등학교 친구의 자리에, 전경에게 맞고 쓰러지는 대학생이 있었다.

너무 화가 나 눈물이 나는데도 무엇하나 해결할 수 없는 내 모습 또한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하나의 굴레를 벗으면 더 모순적인 굴레가 웃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미워해야 할 대상은 때리고 있는 XX가 아니라 때리는 자와 맞고 있는 자가 살고 있는 사회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뿐. 취재도중 만난 한 선배는 지하철에서 광주항쟁에 관한 글을 읽고 있는 학생을 보고 순간 움찔했다며 웃는다.

그래, 80년대 청바지 뒷주머니, 가방 한 구석에 숨기곤 하던 문건이 버젓이 펼쳐져 있는 걸 보고 놀랄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되묻고 싶었다.

이것이 진정 떳떳할 수 있는 사회냐고. 농담 속에 '변혁'이니 '투쟁'이니 하는 단어가 오르내리고, 운동적인 것까지 자본의 이용가치괴 되고 있는, 옮고 그름을 구분할 뚜렷한 잣대의 부재는 필요없어선지 잃어버려서인지 모르겠는 이 모양새가, 과연 쉽게 편할 수 있는 시대의 모습이냐고. 사회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변한 것이 있다면 구속받지 않을 자유라는 이름하에 여러 사상이 악세사리처럼 쉽게 읽히고 쉽게 인정된다는 것, 진보라는 이름하에 아이러니컬하게도 적당히 시각이 좁혀지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한 자유에 만족하고 있다.

굳이 의심하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그럴듯한 특권(?)들이 과거에 그토록 열망하던 자유였던가. 시대는 편하지 않은데 우리는 자꾸만 편해져 간다.

자유와 열정과 도전을 그리던 고등학생의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몇 해 전의 기억이 스물스물 고개를 들고 소리친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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