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가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학보사로 달려가는 나를 보며 “학보사 생활이 네가 하고자 하는 미래에 무슨도움이 돼?”라는 질문을 던졌다.

퇴임을 앞둔 2년여 기간동안 “학보사 왜 해?”라는, 공부에 도움도 안되는 학보사 생활을 왜 하냐는 투의 질문을 자주 받았고 앞으로 기자를 하고자 하는과정쯤으로 여기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리고 며칠전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에 학보사가 방해가 될 것 같아서 학보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한 후배를 보며 동아리를 ‘미래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도내에서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로 여기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또한 대학은 더 좋은 미래, 자아실현으로 가기 위한 힘들게 넘어야 하는과정쯤으로 생각하는게 하닌가. 대학이 취업을 하기 위한 취업양성소로 전락했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이는 대학이 정도를 가지 못하는 이유를 탓할 수도 잇지만 의사·판사·기자·대기업 사원...등을 선호하는 사회의 잣대에 의해서 한없이 소수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을 통과하는 유능한 사람이 되기를 강요받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친구 동생의 5살 때 꿈은 ‘철길’이 되는 거였단다.

터무니없는 꿈이지만 기차가 지나가게 하기 위해서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기특한 생각은 부모님에 의해 혼이 나면서 원대한 꿈만을 강요받았단다.

나의 국민학교 시절 역시 교실한켠에 반아이들의 장래희망을 붙여놓으면 현모양처, 간호사 등의 평범한 꿈은 아이들에게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었다.

사람은 한가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데, 어떤 이는 공부를 잘 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이는 수예·기술을 잘 할 수 있음에도 의사가 되기를 강요받고 좌절하게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의사’, ‘발레리나’가 되고 싶어도 가진 재산이 없다는 타고난 이유 때문에 대학에도 진학하지 못한채 남들에게 하찮게 평가되는 단순노동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요즘 유능한 직종과 하찮은 직종의 잣대는 절대적으로 ‘임금’에 의해 구분지어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나의 이러한 생각들은 선거기간 중 한선본의 신문에서 ‘만일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대우받을 수 잇는 사회가 오면 나는 낙엽을 쓰는 청소부가 되고 싶다’라는 내용을 보며 가슴찡함을 느끼게 했다.

우리 모두가 희구하는 ‘직업의 귀천이 존재하지 않는 내일’을 꿈꾸면서. 오늘 나는 그 친구에게 대답했다.

수업도 제대로 못 듣고 영어공부, 시험공부도 제대로 못해서 오히려 취업을 할 때 해가 될 수도 잇는 학보사를 했던 이유는 “내가 앞으로 살게 될 미래보다 ‘꿈’에서 조차 불평등을 강요받는 현실 속에서 , 한업이 부딪치면서라도 이 현실에 충실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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