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저녁에 방송되는 한 인기 코미디 프로그램에는 형님의 말이라면 두말없이 “예, 형님”하는 조직원, 소위 ‘아그’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의 방청객들은 이 반복되는 장면에도 여러번 웃음을 터뜨리면서 이 것을 재미있게 본다.

그런데 만약 현실 속에서 이러한 상명하복의 수직적 인간관계가 있다면 이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 프로의 방청객들처럼 유쾌하게 웃을 수 있었을까? 물론 여러가지 과장된 희극적 요소들도 방청객들의 웃음을 자아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신의 의사가 완전히 무시되고 심지어 자신의 생활과 관련한 어떤 결정을 내리는 때조차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삶은 답답하고 불행할 것이고 결코 인간다운 삶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인격적 주체이기에 자율적 존재이고 따라서 자기의 생활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일정한 수준의 발언권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의 인격적 구성원인 국민은 정치적 발언권, 즉 참정권을 가진다.

또 기업이라는 경제공동체 속에서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활과 직접 관련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기업참여권, 즉 공동결정권을 갖는다.

학교라는 학문공동체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학생은 학교의 필수 구성요소이다.

학생들만으로 학교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시설과 학습기자재를 단순히 한 장소에 모아 놓았다고 해서 학교가 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학생이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에게 학교와 관련된 일들은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따라서 학생들은 학교에 자신의 의사를 개진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발언권이 실질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 그것이 합리적인 주장이라면 받아들여져야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학생들의 모든 요구가 다 수용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요구들은 일단 적합하다는 가정 하에서 부적절한 점을 검토해 보고 나서 이후에 폐기처리 여부를 결정지어야 할 것이지 처음부터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접근해서는 학생들이 수긍할 수 없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같은 결론이 나오더라도 긍정에서 출발해서 부정으로 결론지어지는 것은 학생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하려는 노력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학생들에게 자신이 인격적 주체로서 생활 내용을 결정하는 데 배제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갖게함으로써 학교 주요 구성원인 학생들을 활성화하고 나아가 결국은 학교 전체의 발전에도 기여할 것이다.

구성원이 활성화되지 않고서는 그 공동체가 활성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생들의 요구에 대해서 학교측은 그 접근 태도를 좀 더 긍정적으로 해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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