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대 총선이 남긴 과제

이번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우리는 몇 가지 이율배반적인 현상을 발견한다.

첫째, 선거의 실질적인 승리자는 총선 시민연대로 대표되는 시민운동이었지만, 한국정치의 고질적인 병폐가 되어버린 지역주의 역시 더욱 강화되었다.

둘째, 자민련을 중심으로 한 수구적 정치세력이 선거의 최대 패배세력인 것은 명백하지만, 진보적 정치세력 역시 이번 선거에서 대단히 뼈저린 패배를 당했다.

셋째, 시민연대의 낙천, 낙선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와 호응은 대단히 폭발적이었지만 투표율은 역대 국회의원 선거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낮았다.

전자는 참여민주주의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준 획기적인 사건이었던 반면, 후자는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냉소와 불신이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민주개방 이후 십여 년 동안 한국 정치사회에 확립된 담합적 정당정치체제는 지역주의의 정략적 확대재생산을 통해 시민사회를 식민화했고, 젊고 진보적인 신진 정치세력의 조직적 성장과 정치사회 진입을 철저하게 차단해 왔으며, 권력자원의 패쇄적, 담합적 배분을 둘러싼 정략적 이합집산을 거듭해 왔다.

그리고, 이번 총선에서 나타난 부정적 현상들은 이와 같은 담합적 정당정치체제가 여전히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입증해 준다.

즉, 영·호남지방 유권자들의 지역주의적 투표형태는 이들의 대다수가 여전히 지역할거형 담합정치의 볼모로 남아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이런 가운데 다시 반복된 진보세력의 패배는 바로 이 지역주의가 보수독접적 정치구조를 온존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을 입증하였다.

그 결과 지역주의와 보수주의는 오늘날 한국 정치 사회에서 동시에 극복되어야 할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대상임이 또 다시 명백해졌다.

한편 저조한 투표율은 보수주의와 지역주의에 기생해서 온갖 부정적 이권과 특권을 향유해 오면서 한국 정치를 부패와 타락과 정체의 심련으로 빠뜨려 온 정치사회에 대한 시민들의, 특히 젊은 유권자들의 비난과 냉소를 반영한다 할 것이다.

4.13 총선의 이와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번 총선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에 중대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망이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총선 시민연대의 활동과 이에 대한 시민들의 폭발적인 호응이었다.

왜냐하면 보수주의와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한 담합적, 폐쇄적 정치사회의 근본적인 혁파는 결국 시민사회가 담당해야 할 역할이며, 또 한국의 시민사회가 그런 역할을 수행할 잠재적 역량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 총선 시민연대의 활동을 통해 드러났기 때문이다.

좀더 역사적인 시각에서 바라 볼 때, 시민연대가 주도했던 낙천, 낙선운동은 1987년 민주화 투쟁 직후에 시민사회가 정치사회에 넘겨주었던 민주이행의 주도권을 다시 되찾아서 미완의 민주주의를 시민사회의 주도로 완성시키기 위한 운동이 이제 본격화되었음을 뜻한다.

즉, 과거 권위주의 독재체제를 타도하기 위해 권위주의 국가에 대항해여 형성했던 전선을 대체해서 이제 시민사회는 민주주의의 완성을 목표로 보수독점적, 지역분할적, 폐쇄적 정치사회에 대항해서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치사회의 혁파를 둘러싸고 형성되기 시작한 이 새로운 전선은 그 동안 시민사회 내에 활발하게 조직되었던 수많은 시민운동 세력들을 강력하게 결집시키고 또 짧은 시간 내에 범시민적 지지와 호응을 동원해 내는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다.

이처럼 확인된 시민운동의 결집력과 동원력은 스스로의 개혁을 거부해온 정치사회에 경종을 울려주었다.

즉, 시민사회는 이제 더이상 정치사회의 전횡에 수동적으로 끌려가지 않을 것이며, 만약 정치사회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전향적 개혁을 거부한다면 시민사회의 결집된 역량으로 이를 분쇄하고 개혁을 관철시키려 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이번 총선을 통해 명료히 전달되었다.

자민련의 몰락, 그리고 수많은 구시대 중진 정치인들의 몰락은 시민사회의 이와 같은 의지가 실제 관철되고 있음을 생생히 보여 주었다.

이제 시민사회는 이번 총선에서 확인한 역량을 한국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한 정치개혁에 집중시켜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시민사회는 지역주의, 보수독점주의, 폐쇄적 담합주의의 총체적 극복을 통한 정치사회의 쇄신에 정치개혁의 목표를 두어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요청되는 것은 권력구조를 포함한 정치제도를 민주성, 투명성, 형평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바꾸는 일일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개혁은 한국 민주주의를 보다 참여적이며 보다 실질적인 민주주의로 진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정치개혁은 이제 한국 민주주의의 진정한 완성을 위해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또 현재 한국 정치사회를 분할, 정악하고 있는 기성 정치세력이 결코 자발적으로 정치개혁을 단행하지 않으리라는 사실 역시 지난 10여 년의 좌절을 통해 분명히 확인되었다.

반면 시민사회가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한 정치개혁을 주도하고 관철시킬 역량을 갖추고 있음이 이번 총선을 통해 확인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를 위한 시민사회의 역량을 결집시켜서 시민들의 힘으로 정치개혁을 관철하고 참여적, 실질적 민주주의를 완성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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