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늦진 않을까 생각했다. 현역으로 입시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간 친구가 사진 동아리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즐겁게 지내고 있을 때 나는 독서실에서. 고난도 비문학 지문을 풀었다. 늦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늦어도 가고 싶은 길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컸던 탓에 주변의 온갖 반대와 우려를 피해 독서실로 향했다.

혼자 다시 하는 수험생활은 막막하고 두려울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정해진 것 하나 없이, 이미 정해진 것 같은 삶을 사는 주변 친구들과 다른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정해지지 않은 미래가 불안했고, 사계절을 꼬박 쏟고도 끝이 나면 남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죽도록 답답했다. 그렇게 6달을 보내자 생각이 달라졌다. 나를 좌절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어 기제였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확실히 달라졌다.

당시 여름의 절정이던 8월의 어느 날 평소처럼 버스를 타고 독서실에 가고 있었다. 텅텅 빈 토요일 아침 버스에 탄 나는 우연히 어떤 글을 읽게 됐다. 한 가수가자기 동생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쓴 글이었다. 그는 동생을 잃고 나서 1년 반 동안 비관론자가 되어 ‘내일’에 대해 생각했다. ‘내일 바로 죽을지도 모르는데 다 무슨 소용이냐’는 내용의 생각들이었다. 있는 돈을 전부 탕진하고, 술에 취하는 게 일상이 된 그가 1년 반 만에 동생의 죽음을 인정하며 깨달은 바가 있었다. 바로 ‘오늘’의 가치였다. “내일 죽어도 좋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당신의 오늘이 완성되었으면 좋겠다”는 문장을 읽은 나는 우는 법을 처음 배운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재수를 시작하고 눈이 부으면 공부에 지장이 가니 울지 말자고 되새기던 것이 스쳐 지나갔지만 개의치 않았다. 글쓴이가 한순간 깨달았던 것처럼 나도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지금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전에도 종종 스피노자의 말을 떠올리곤 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 수험생활을 시작하기 이전의 나라면 내일 죽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한숨을 내쉬었을 터였다. 그런데 버스에서 그 글을 읽는 순간 이제 그 말의 뜻을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그 당시 일기장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할 공부를 해야지’라 고 적어 두었다. 지치고 불안한 건 여전하지만 좋아하는 것이 있고, 목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좋고, 기회가 있음에 감사하고, 목표를 향해 하루하루를 직접 채워 나갈 수 있는 순간이 소중하다는 것이었다. 미래를 위한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가장 원하는 일을한다면 이 일을 하겠다는 마음가짐. 미래에 행복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내가 행복해야 한다는 것. 스무살의 내가 배운 가장 큰 가치였다.

대학교 2학년이 된 지금,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느냐 묻는다면 솔직히 곧장 고개를 끄덕이진 못할 것 같다. 우선 밤샘을 밥 먹듯이 하다 보니 ‘오늘’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인지도 불확실할 뿐더러, 지치다 못해 지침에 무감각해진 듯하다. 이런 마음을 한편에 미뤄둔 채 취재 3부서 인터뷰 기획에서 ‘시간을 달리는 여자들’에 참여해 10대부터 70대까지의 여성들을 만났다. 샛노란 은행잎이 흩날리던 10월의 마지막 주, 그 대장정의 마무리를 위한 좌담회 자리에서 10대, 20대, 50대 그리고 70대 대표 취재원분들과 함께 둘러앉았다. 11명의 기자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전에 없던 기획을 위해 머리 싸매고 고민한 덕에 ‘이게 될까’ 싶었던 기획이 확신을 키워가며 그 자리에 도달할 수 있었고, 나도 모르는 새 그들이 달려온 시간을 함께 달려가고 있었다.

70대 대표 윤영주 선생님은 50대에 미학 박사 학위를, 일흔넷의 연세에 시니어 모델을 하고 계신 분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건 아닌데, 그렇다고 늦은 건 아니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남들이 늦었다고 한 시기였지만, 늦었기 때문에 했던 더 많은 경험을 통해 미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시니어 모델이 되어서도 해낼 수 있었던 것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20대 후반의 고민을 50대의 눈으로, 50대의 고민을 70대의 눈으로 바라보니 인생이 작디작은 우주처럼 느껴졌다. 속도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가 정해져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인생의 거리는 모두 다르기에 그 장단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 빠르기가 어떻든 모든 순간은 우주에 하나의 점으로 남는다. 언제까지 찍힐지 불확실해도 각각의 점들이 온전히 찍힐 수 있도록, 내일 죽는대도 좋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매 순간 온전한 나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다시금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야 할 시점이다. 나는 크게 대담하지 않은 사람이라 그 글을 쓴 가수처럼 “당신의 내일 같은 건 관심도 없으니 부디 오늘이 행복하길 바란다” 같은 말은 하지 못한다. 다만, 내일도 내가 살아있다면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내일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시간이 조금 걸린대도 나는 다시오늘의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갈 것이다. 매일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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