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민(불문·05년졸) 큐레이터
이혜민(불문·05년졸) 큐레이터

 

본교 불어불문학과를 2005년 졸업하고 한국일보문화사업단에서 미술 전시기획과 홍보 마케팅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서울시립미술관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모네전, 반 고흐전, 르누아르전, 고갱전 등의 대규모 회고전을 담당했다. 프랑스 유학 이후 K현대미술관 큐레이터, 일민미술관 선임 홍보로 근무했으며, 현재 독립 전시기획자로 일하며 AI를 활용한 예술교육 등 다양한 융복합적 강의와 글쓰기를 하고 있다.

 

“큐레이터 처음 봐요. 근데 어떤 일 하시는 거예요?”

직업이 ‘큐레이터’라고 하면 대부분 신기한 눈빛으로 궁금해한다. 요즘은 도슨트(전시해설사)와 큐레이터를 서로 유의어 관계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도 그렇게 많다. 간혹 미디어를 통해 단편적으로 그려지는 그 모습만큼이나 큐레이터라는 직업은 사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실제로 우리 부모님마저 누군가에게 딸의 직업을 설명하는데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계신다. 의사, 변호사, 선생님, 회사원같이 단어 하나로 단번에 설명될 수 없는 문화 예술계의 멀티플레이어(multiplayer), 전시의 A to Z를 이해하고 실행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큐레이터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작품의 이해를 도와주는 전시해설사의 역할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국내에서는 학예연구, 전시기획, 교육홍보 등 세부 역할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필자가 속한 큐레이팅의 영역은 전시기획에 훨씬 가깝다.

 

어쩌다, 큐레이터

많고 많은 직업 중에 큐레이터로 살아간다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적어도 누가 시켜서 혹은 누구 보기 좋으라고 선택하는 직업은 아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는 질문 다음으로 많이 받는 질문이 ‘어떻게 큐레이터가 되었냐’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는 학부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동대학원에서 프랑스언어학(그중에서도 전산언어학)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수료한 후, 한국일보 문화사업단에서 큐레이터로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미래의 기계번역에 도움 될지도 모를 프랑스 요리사전 표제어와 씨름하고 있던 대학원 생활 중 문득 현실 세계의 ‘일’이 하고 싶었고, 주저 없이 검색창에 ‘영어, 프랑스어 우대’를 검색했던 것이 바로 그 시작이었다. 문화와 예술이 좋아 ‘아베쎄데(프랑스어로 A, B, C, D)’도 모르고 불어불문학과에 지원했으니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대한 동경과 관심이 장착돼 있던 것은 기본값이었다.

 

기이한 하이브리드

좋아하고 잘하는 것(언어 및 예술 영역)이 나름 분명했지만, 부모님이 바라던 직업 카테고리와 근본적으로 달랐기에 스스로 잘하는 것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이 제일 싫었는데도 ‘이과’를 선택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했고, 수학 잘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내신을 따며 수능을 준비해야 하는 이중고를 맞닥뜨렸다. 제일 약점이었던 수학, 물리 등 응용 학문을 나름의 방식과 속도로 부단히 마주한 결과 일정 단계를 넘어설 수 있었는데, 이때의 경험은 문과적이기만 하던 나의 사고체계에 이과적인 사고가 싹을 틔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선호하는 것은 언어적이면서도 예술적인 것이었음은 변함없었다. 그런 이유로 수능 신청 당시 계열 선택을 ‘문과’로 결정했고, 내신은 ‘이과’, 수능은 ‘문과’로 치르는 기이하면서도 고생스러운 하이브리드(hybrid)를 자처하게 됐다. 이 힘든 경험은 최근 인공지능 예술강의를 하게 되면서 특히 플러스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는데, 요즘 흔히 말하는 준비된 ‘융복합적 인재상’에 부합하게 된 것이다.

 

자율적인 배움과 경험에 길이 있다

다시 돌아와 큐레이터가 되는 방법을 묻는다면, 그것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그리고 어떠한 실패도, 고생도 모두 다 자신을 이루는 소중한 경험적, 지적 자산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결국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자신만의 영역이 있고 그것이 문화예술과 접점을 이룰 수 있다면, 누구든 큐레이터가 될 자질이 있으며 전시기획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학부 전공 자체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관심 분야를 넓히고 계속해서 자율적으로 공부해 나가는 자세는 필수이며,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기본이다. 어쩌면 서른 넘은 나이에 쌍둥이 아이들을 대동하고 프랑스 유학길에 오를 정도의 무모함이 필요할 수도 있다.

 

전시기획, 예술적 밥상을 차리는 일

마지막으로 큐레이터로서 기획이란 비유적으로 ‘정갈한 예술적 밥상을 차리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가(예술가)와 관객(감상자)의 사이에서 둘 다 만족할 만한 ‘근사한 밥상’을 차려내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렇기에 더 나은 전시기획을 위해서는 작가의 예술세계만 대변할 수도, 대중적인 니즈(needs)에만 치중할 수도 없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순간, 작품과 관객 사이에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와 감상자 사이의 새로운 영역을 창조해 내는 일이 바로 전시기획이라 생각한다.

범람하는 콘텐츠와 자본의 한계 속에서, 누군가 이 어렵지만 창조적인 길을 가고자 한다면 쉽게 독려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문화예술이 지니는 대체 불가능한 고유의 가치를 믿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의미를 발견하고, 의도하지 않은 새로움을 포착해 나가는 배움의 연속, 이것이 바로 큐레이터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혜민(불문·05년졸)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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