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엽 이대동창문인회 회장
김소엽 이대동창문인회 회장

본교 영어영문학과를 1965년 졸업하고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8년 ‘한국문학’에 시 ‘밤’으로 등단한 이후 『그대는 별로 뜨고』(1987), 『지난날 그리움을 황혼처럼 풀어놓고』(1992), 『마음 속에 뜬 별』(1995), 『사막에서 길을 찾네』(2008), 『꽃이 피기 위해서는』(2012), 『별을 찾아서』(2013) 등 시집 15권과 수필집 다수를 펴냈다. 윤동주문학상(1995), 종려나무상(2014) 등을 수상했다. 현재 대전대 석좌교수로 있다.

지방의 사범학교에 다니다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 영어영문학과에 처음 입학했을 땐 내가 생각해도 실력이 형편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범학교에서는 예체능 과목과 교육철학, 교육사 등 지금의 사범대학에서 배우는 과목을 전부 이수하는 대신 영어, 수학은 젖혀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당시 소설을 가르치셨던 나영균 교수님은 윌리엄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라든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같은 어려운 책부터 읽혔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쓴 책은 정말 독파하기 어려웠다. 번역서를 읽어도 뜻이 통하지 않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살았다. 도서관은 밤 10시에 문을 닫았다. 나는 도서관 문이 닫힐 때까지 언제나 남아있어서 ‘도서관 대학생’이라는 별호까지 받았다. 영어 단어를 찾는 데만 몇 시간씩 걸렸다. 그러고도 뜻을 이해하지 못해 번역서까지 대동하고 공부했다. 그 결과 성적에 까다롭기로 유명한 나 교수님 소설 과목에서 A학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영어 단어와 씨름하며 1년이 지난 뒤엔 2층 열람실을 찾기 시작했다. 그곳에 놓인 ‘사상계’ ‘현대문학’ 등의 월간지를 통해 조지훈, 박목월, 서정주, 박두진 등 시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다시금 다지게 됐다.

처음 시를 쓴 건 초등 5학년 때였다. 어머니께서 6‧25전쟁의 후유증으로 돌아가시자 나는 완전한 상실감과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아픔에 싸여 지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석 달 만에 어버이날을 맞이했는데, 그때 열린 교내 백일장에서 어머니와의 추억을 시로 쓴 것이 장원이 됐다. 나는 담임선생님의 한마디 말씀을 붙잡고 일어섰다. “아무개는 앞으로 훌륭한 시인이 될 것이다”라는 그 말씀은 나의 상실감을 어느 정도 회복시켜 주었고 자존감도 살려주었다. 나는 슬픔을 달래며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때 문예반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문학의 지평을 넓히려고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한 것은 그런 까닭이다.

훌륭한 시를 쓰려면 적어도 세계문학전집은 모두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음사에서 발행된 세계문학전집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이때 감동적으로 읽은 작품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좁은문’ ‘부활’ ‘죄와 벌’ 등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읽다가 팽개친 작품이 하나 있는데,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었다. 작품의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다른 샛길로 빠져서 하염없이 흐르고, 마치 인간의 내부 지하 갱도를 들어가다 실핏줄 사이로 빨려 들어가 길을 잃고 헤매는 꼴이 됐다. 작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난삽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그 소설을 다시 조우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그렇게도 난삽했던 문장이 머리가 아닌 가슴을 헤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의 석사 논문은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에 나타난 죄와 구원의 성서적 이해’였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하나님을 머리로만 믿었지, 가슴으로는 믿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한 권의 소설이 인간의 영혼을 흔들어 놓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수십 년 교회를 다니며 예수그리스도가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나는 죄인이라는 설교를 얼마나 많이 들어왔던가.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 나는 죄인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의인이었고 ‘너’로 불리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었다.

그러나 이 한 권의 책은 내가 죄인임을 최초로 깨닫게 해 줬다. 나는 조시마 장로의 설법과 대심문관의 심문을 통해 전율을 느끼며 내가 죄임임을 눈물로 고백했다. 첫째 아들 드미트리의 불신앙의 죄, 둘째 아들 이반의 반(反)기독교적 합리성과 인간적 유토피아를 꿈꾸는 죄, 셋째 알료샤의 하나님을 관념적으로 믿고 행동하지 못하는 위선적 신앙의 죄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감춰진 인간의 죄를 작가는 낱낱이 무대 위에 올렸다. 인간 심리를 해부하듯 밝혀내는 천재적인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작이란 무엇인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우리에게 영적 지진을 일으키게 하는 책이 아닐까. 목사님의 설교로도 깨어지지 않던 내 안의 단단한 교만이 한 권의 책으로 여지없이 부서졌다. 하나님을 믿은 지 30년 만에 이 책으로 비로소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진정한 구주가 되었으니 책의 힘이 놀랍지 아니한가.

나는 대학 시절 이대학보에 가끔 시를 발표하기도 했고 문리대 잡지인 ‘녹원’에 시를 싣기도 했다.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 온 나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그렇기에 책과 더 가까운 시간을 보내지 않았나 싶다.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이 다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몇 시간 책에 빠져 있다 보면 출출해졌다. 본관 지하에 있는 작은 상점에서 빵 하나를 사 들고 나는 뒷산에 올랐다. 그리고는 멀리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며 시를 짓고 즐겼다. 그 덕에 지금 내가 시인으로 이나마 행세하며 사는 게 아닐까 싶다.

김소엽 이대동창문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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