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너와 나(2023)

출처=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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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먹혔지만 갈변하지 않은 사과, 세미의 상이 맺힌 거울, 아이가 웅덩이에서 건지는 공룡... ‘너와 나’(2023)의 메타포들은 영화가 축조한 미결정의 세계를 지탱한다. 이곳에서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 등의 상투적 경계란 영화 속 탁자 끄트머리에 위태롭게 놓인 유리컵처럼 툭, 치면 횡단할 수 있는 무엇이다. 매 쇼트를 호위하듯 감싸고 있는 빛의 노출이 담지하는 것 또한 수학여행 전날 고등학생 세미와 하은의 하루를 담은 이 영화의 일부, 혹은 전체가 살아남은 자의 백일몽이라는 가능성이다. 좋아하는 하은이 죽는 불길한 꿈을 꾸고 깨어난 세미로부터 도약하는 영화는 집약된 하루 안에 겪는 무수한 마음의 동요를 경유하여 세미가 희미해진 꿈을 점차 선연하게 복기하도록 인도한다. 그런데 연상된 꿈은 영화 외부의 시간을 기입하자면 도리어 미래의 현실이라 짐작된다. 요컨대 영화가 갖은 지표를 통해 가까스로 지시하는 세월호 사건이 관객에게 과거일 때, 시간의 축은 뒤섞이고 중첩된다. 오히려 영화 표면상 현재로 상정된 서사는 시간이 박제된 시계가 상징하듯 사건 이후의 하은이 영구적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과거이자 꿈이다. 무화되는 꿈과 현실, 비선형적인 시간성은 내러티브의 기반이 되어 세미가 고백을 다짐하게 하고 서사를 추동시킨다.

하물며 영화의 제목 ‘너와 나’는 시간성과 더불어 무화되는 경계들과 함께하는 개념이다. 너는 나에게 선행하고, 나는 너로 구성된다. 죽은 자인 세미는 꿈을 통해 남은 자인 하은이 되어 깨어난다. 한편 영화 전체가 영구히 반복될 하은의 꿈이라면, 하은은 세미가 되어 수학여행 하루 전날을 거듭 살아가고 있다. 내가 너가 되고, 너가 내가 되는 일은 필연적인 것이기도, 필사적인 수행이기도 하겠지만, 너를 상실할 때 나 또한 나의 일부를 상실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죽어있는 하은의 얼굴이 다른 누군가의 얼굴들로 미세하게 변화하는 상징적인 쇼트에서 너의 죽음은 나의 죽음에 다름 아니며, 어쩌면 내가 너로서 살아있는 한 완전한 죽음일 수도 없다. 더불어 영화로써 세미, 하은과 연루된 관객이 죽음과 상실이라는 같은 섭리를 감수하고 있다는 진실은 또 다른 연관을 파생시킨다. 관객은 공동의 기억을 가진 또 다른 ‘너’가 되어 스크린의 너머로 입장한다.

세미를 초점화하는 카메라는 안산의 시내를 조망하는 롱 숏과 더불어 수학여행의 전날의 저녁을 보내는 학생들을 촬영하면서 전지적으로 물러나기도 한다. 생생함을 담보한 해당 몽타주 시퀀스에서 활성화되는 것은 비단 세미와 하은뿐만이 아니라 수학여행을 떠났던 아이들이 생동과 생기를 간직한 존재로서의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너와 나’는 세월호 사건의 자장에 머물러 있지만 사건의 전말을 핍진하게 목도하는 재현이나 사건의 피해자와 유족을 오로지 분노와 슬픔에 갇힌 피해자로 타자화하는 시선과는 거리를 둔다. 애도에 있어서 기억이라는 당위 이전에 가능해야 하는 바는 피해자로 규명된 정체성이 소거해버린 그들의 삶, 여타의 정체성과 다층성을 소생하는 일일 수 있다. 그들이 얼마나 생생한 존재였는지를 염두하고 그들을 화면 속에서 살아나게끔 하고자 했다는 영화의 연출 의도가 애도 작업에 있어서 정당성과 필요성을 획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건 이후’가 아니라 수학여행 하루 전날이라는 ‘사건 이전’으로 돌아가 무언가를 좋아하고 미워하고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의 삶을, 피해자 이전의 삶을 복원해 내려는 시도에 있을 것이다. 유치하고 이기적이고 좋아하는 모든 것이다.

현실과 꿈, 과거와 현재가 서로에게 침투할 때, 경계가 무화된 장소에서 피어나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의 후반부, 세미는 잠에 들기 직전 반려 앵무새 조이에게 ‘사랑해’를 반복하며 사랑을 가르친다. 사랑을 습득한 조이는 세미가 부재한 후에도 세미의 대변자로서 남은 자들에게 사랑을 거듭 발화해 줄 것이다. ‘너와 나’가 죽음과 상실이라는 명백한 조건 속에서도 기어이 사랑을 발화할 때 재발견되는 사랑이란 영화가 모든 경계를 무화하면서 행한 애도와 기억술 또한 종내는 사랑에 의해 가능했다는 진실이다. 경계가 무화된 곳에서야 사랑을 소생할 수 있지만 애초에 경계를 무화하는 일조차 사랑에 의해 가능했다는 역설. 세미가 속삭이는 ‘사랑해’를 목도할 때 남은 자로서의 관객은 세미의 사랑이 연명하기 위해 일정 부분 책무를 공유한다. 더불어 중첩된 시간성 속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하은을 세미가 끌어안을 때 상실의 숙명, 혹은 공동의 트라우마를 가진 살아남은 자로서의 관객들은 세미의 품에 안겨 위무된다. 영화의 마지막 쇼트에서, 다시금 경계를 무화하듯 눈을 뜨는 세미의 얼굴 위로 관객은 우리가 상실하고 말았던 또 다른 얼굴들을 겹쳐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대전제로서 사랑이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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