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완 영화감독
​박지완 영화감독

본교 방송영상학과를 2003년 졸업했다. 이후 한국영화아카데미를 나와 장편 영화 ‘내가 죽던 날’(2020)을 만들었다. 2021년 백상예술대상 각본상과 청룡영화제 신인감독상을 받았다.

내가 쓰고 연출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영화가 개봉할 즈음 했던 인터뷰에서 영화 학교를 졸업하고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1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어떻게 버텼는지에 관한 질문을 참 많이도 받았다.

내가 정말 그것만을 위해 버틴 것인가는 차치하고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쩌면 정말 어리석게 보일 수 있는 시간이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무언가 되기 위해 시간을 보낸다는 것, 그리하여 한 사람의 몫을 못 하며 지낼 수도 있다는 공포심이 당연히 나에게도 있었다. 다만 영화라는 것은 결과물로서만 존재를 드러내는데,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유일하게 영화라는 사실을 감수하며 보낸 시간이 길어졌던 것뿐이다. 지금도 장편 상업영화를 한 편밖에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직업란에 영화감독이라고 적기에는 조금 망설여진다. 당당하게 직업으로 쓰기 위해서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람에 가깝다.

영화감독이라고 하면 흔히 촬영 현장에 있을 걸로 생각하고, 모든 작업이 끝난 후 인터뷰 정도로 사람들에게 보여진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작업 중 촬영은 한 부분이고 촬영을 포함해 제작 자체가 결정되길 기다리는 일이 나의 경우에는 훨씬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런 이유로 오랜 시간 동안 나에게 책은 중요했다. 좋아한다는 의미와는 조금 다르게,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했다. 어쩌면 책은 나를 그 시간을 지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거절 속에서 크게 상처받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적당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데, 나는 책에 의지했다.

여러 번 고쳐 쓴 시나리오는 곧 영화로 만들어질 것만 같다. 투자가 정해지고 배우가 결정되어 다음 계절에, 적어도 올해에는 촬영에 들어갈 듯 진행되다가 갑자기 멈춘다. 이 과정은 친구나 가족에게 설명할 때마다 곤혹스럽다.

자, 촬영에 이르는 과정을 이어달리기라고 해보자. (실제로는 촬영 이후에도 작업이 남아있다) 시나리오라는 바통을 들고 혼자 달리다가 함께 만들 사람을 만나 바통을 넘겨주고 그 바통이 계속해서 다음 단계의 누군가로 넘어가야 촬영이라는 지점까지 갈 수 있는데, 중간에 바통을 넘겨받을 사람이 사라지거나, 달리는 트랙 자체가 사라지는 식으로 결국 이어달리기 자체가 무산된다.

다시 나와 시나리오만 남은 채로, 나는 여전히 그것을 영화로 만들고자 한다. 그때 이 작업에 대한 애정과 집중력을 잃지 않으면서 현재 상황을 점검하고 실망과 자책을 최소화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럴 때 나는 도서관에 간다. (언뜻 영화관에 갈 것 같지만 당장 내 영화를 만들 수 없는 상황에서 남의 영화를 보는 일은 나를 더 작게 만들 수 있다) 도서관에서 사람들이 책만 읽는 것은 아니다. 서가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사람도 있지만, 누군가는 옆 사람의 책장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다른 공부를 한다. 무더운 여름날 잠시 시원한 바람을 쐬려고 들어오기도 하고 요즘 흔치 않은 종이 신문을 읽으러 오기도 한다. 나는 모두가 결국 도서관의 공기가 필요해서 온다고 생각한다. 조용한 가운데 생기 있는 장소는 흔하지 않다.

열람실에 들어선다. 원하는 게 분명하지 않더라도 가지런히 꽂힌 책의 제목들을 찬찬히 보다 보면 궁금했던 주제의 책이 보이기도 하고 뜻밖에 정말 재미난 이야기를 발견하기도 한다. 서가를 서성이다 보면 나를 새롭게 해줄 무언가는 발견할 수 있다.

뭐든 책으로 먼저 알고 싶은 사람인 나는 강아지를 처음 키울 때도, 간단한 음식 조리법을 찾을 때도, 어려운 경제 용어를 접했을 때도 책을 검색한다. 신기하게도 어떤 주제든 한 권의 책은 이미 존재하고 있다. 얼마나 든든한가.

지금 보고 싶은 책을 가장 빨리 구하는 방법도 근처 도서관에 소장된 책을 빌리는 것이다. 요즘은 서점에 모든 책이 있지도 않고, 하루 배송이라도 어쨌든 멀리서 책을 구해와야 하는 일일 텐데, 가까운 도서관에 갖춰져 있다면 고마운 일이다.

또 함께 보고 싶은 책들은 희망도서로 신청할 수 있다. (후배님들이여, 학교 도서관에 있는 영화 관련 비싼 책들 중 제가 신청한 책들이 꽤 있습니다) 종종 내 집의 책장을 정리할 때도 근처 도서관에서 검색해보고 그곳에 없다면 기증한다. 서가를 거닐다가 내가 한번 읽고 기증한 책이 다른 이들의 손때가 묻은 채로 꽂혀 있는 걸 발견하면 뿌듯하다.

서가에서도 뭔가 얻지 못할 때는 잡지를 모아둔 구역으로 간다. 사람들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얼마나 세세한 취미와 관심사가 잡지까지 만들게 하는지 알 수 있다. 종종 어린이 서가에도 들러본다. 내가 어렸을 때 상상하지 못했던 다양한 종류의 재미난 동화와 청소년 도서들이 나를 놀라게 한다.

그렇게 도서관을 돌아다니다 보면 현재 상황에 실망한 내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가 조금 생긴다. 서가에 꽂힌 다양하고 새로운 세계가 나를 천천히 위로한다. 그리고 그중 몇몇 세계를 골라 찬찬히 들여다본다.

더 좋은 이야기가 나에게 생길 것이다. 더 나은 것을 만들 것이다. 정말 멋진 이야기라면 영화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주문을 외우면서.

어느 날 도서관에서 나는 다양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며 다음 시간들을 만들 것이다.

박지완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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