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학기의 끝을 떠올린다. 어쩌다 이른 종강을 맞았으나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게는 후편집이라는 역할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후편집은 내용 구성을 마친 영상이 보기 좋도록 어울리는 옷을 입히는 작업이다. 어떤 옷이 어울릴 지 충분히 고민해야 하지만 전날까지 세 전공을 오가며 다변수함수와 메타버스를 논하던 내게 그런 창의력은 솟지 않았다. 아직 종강까지 달리느라 바쁜 동료 기자를 붙잡고 어떤 자막, 효과음, 색상, 모션이 좋은지 질문을 던지는 스스로가 부담스러웠다. 종강을 맞아 오랜만에 찾은 본가에서 편히 쉬기는 커녕 새벽 내내 뜨거은 노트북을 붙잡고 씨름하는 상황도 싫었다.

사실 지겹도록 자연스러운 상황이다. 내 시선은 공허함에 맞서 늘 앞을 향했기 때문이다. 20학번으로 입학한 3년 전 봄으로 돌아가 본다. 코로나는 잔인할 만큼 공평하게 모두의 일상을 휩쓸었다. 대학생의 낭만은 둘째 치고 열심히 짠 시간표가 텅 비어버린 공허함은 견딜 수 없었다. 그 공백을 채워야 한다는 책임 없는 책임감은 나를 동아리에 데려다 놓았다. 그렇게 영상을 만났다. 수업이 날 부르지 않아도 촬영 장비를 지고 빈 캠퍼스를 마음껏 누볐다. 빈 강의실에 앉아 새내기, 고학번, 심지어 교수님의 모습을 상상해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기차에서 정말 교수님이 계신 원격 강의실에 출석하는 웃픈 일상이 내게는 행운이었다. 영상은 나를 동기, 선후배, 캠퍼스와 묶어줬을 뿐 아니라 진심을 쏟을 무언가 되어주었으니까. 동아리를 시작으로 학교 홍보실, 지금의 학보까지. 나의 낭만을 영상에 차곡차곡 담았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다. 상상에서 벗어나 캠퍼스의 온기를 직접 느끼고 영상에 담고 싶었다. 여전히 온라인에서 흘러가는 학기를 붙잡고 싶어 휴학을 택했다. 감사하게도 회사에 인턴이라는 신분으로 한 학기, 그리고 방학까지 6개월을 보냈다. 등교보다 출근을 먼저 경험하다니, 모든 상황이 낯설었지만 든든한 선배와 인턴 동기들 덕분에 소중한 경험들로 그 시간을 채웠다. 아이러니하게도 학교에 대한 기대 또한 커져 갔다. 돌아가면 더 배우겠다, 더 성숙한 사람이 되겠다는다짐 같은 것 말이다. 퇴사 후 일주일 만에 다시 학교에 내던져진 나는 들떠 있었다. 하지만 기대는 실망과 비례한다는 허무한 진리 때문일까? 기대만큼 매일 즐거울 수는 없었다. 다시 만난 동기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고학년의 무게를 견디고 있었다. 밥 한 끼를 같이할 시간이 없어 늘 나중을 기약하며 각자 강의실로 향했다. 아쉬움에 멍하니 홀로 남겨졌을 때, 복도에 주저앉아 학보 메일을 확인할 때, 첫 대동제에서 삼각대를 지고 뛰어다닐 때. ‘지쳤다’는 경보가 울렸지만 멈출 여유도 없었기에 일단 학기를 달려갔다.

다시 그날의 새벽녘을 떠올린다. 완성본을 넘기고 쓰러진 내게 어느 날의 기억이 스쳤다. 학교로 복귀를 앞둔 2월의 어느 날, 엔딩 크레딧 앞에서 펑펑 운 기억이다. 영화 ‘타이타닉’(1998)을 본 후였다. 불침선이 침몰하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저마다 사랑을 전하던 비극적 엔딩에도 나는 여전히 저녁 연회에 멈춰 있었다. Make it count, ‘순간을 소중히’라는 건배사는 새로 펼쳐질 봄학기를 소중히 ‘하자’는 청유문으로 들렸다. 부끄럽게도 나는 학기를 채운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지 못했다. 그제서야 비로소 그 말의 맥락을 살폈다. 잭은 건배사와 함께 자신을 소개했다. “저로서는 부족할 것이 없죠. 제가 숨쉴 공기와 스케치북 한 권이있으니까. “ 무엇이 나의 순간을 소중히 하는지 고민해 본다. 우선 내게도 숨 쉴 공기와 카메라가 있지 않은가? 새벽 작업도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어떤 질문에도 친절하게 답해주는 미디어부 동료 기자들과, 옆에서 잠든 반려견 심쿵이와, 응원이 담긴 이화쿠키가 함께했으니.

그렇게 시작된 방학 동안, 나를 지탱하는 크고 작은 것을 찾아 나섰다. 자격증 공부는 접어두고 아무 생각 없이 영화를 내리보았다. 책을 읽어보려 간 서점에서 결국 작은 수첩만 집에 데려왔다. 멋들어진 표현을 하고 싶어 무엇이든 써내려갔다. 그 사소한 것들이 길고 무더운 나의 여름날들을 지탱했다. 그리고 두 학기도 남아 있다. 하지만 더 이상 공백을 채워야 한다는책임감은 없다. 그 순간을 당연히 흘려보내지 않길, 기왕이면 재미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럼에도 이번 학기에 거창한 다짐을 붙여 본다. 순간을 지탱하는 모든 것을 기억하려 애쓰겠다. 당연히 방학만큼 시간 여유도 없고 내게 부장 기자라는 무게가 더해졌지만 그럴수록 눈을 더 크게 뜨고 기억하려 한다. 정문을 지나 마주한 대강당, 저마다의 속도로 캠퍼스를 지나는 벗들, 오랜만에 온 친구의 연락, 실없는 농담들도. 오늘도 내가 보고 느끼는 모두가 매 순간을 소중히 지탱했다. 순간을 소중히 ‘    '하는 것, 빈칸에 어울리는 표현을 여럿 떠올리다 ‘지탱’를 골랐다. 내가 잠시 넘어지더라도 기억 속 모든 것들이 단단하게 나를 받쳐 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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