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가을이다. 조금씩 선선해지는 날씨와 쓸쓸함을 느끼는 계절에서 어느덧 2023년이 절반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사실이 믿기지 않는 요즈음이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지난날을 되돌아보곤 한다. 올해는 유독 안타까운 소식들로 가득하다. 신림역 칼부림부터 시작된 연쇄적인 흉기 난동과 예고 글들로 많은 사람들이 공포감을 느꼈으며, 등산로에서 성폭행 살인이 벌어지는 등 몇 달 사이에 순식간에 몰아친 사건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일들이 가득하다. 수많은 사건·사고 속에서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며 최근에는 흔하게 볼 수 없는 ‘정(情)’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따라서 오늘은 그러한 ‘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 그 중요성을 다시금 환기하려 한다.

최근 다시 시청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2015)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웃 간의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특히 식사 시간에 반찬을 서로에게 보내기 바빠 아직 수저도 들지 못한 사람들, 가족만큼 애틋한 이웃 주민들을 보고 있으면 아파트에 거주하는 현재의 사람들과는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이다. 지금은 어떠한가? 내 모습을 돌아보면 엘리베이터를 탈 때조차 조금이라도 더 떨어지기 위해 모서리에 붙어 있으면서, 정적이 민망해 괜한 휴대전화만 붙잡고 있다. 같은 층에 살고 있어도 상황은 비슷하다. 이사 온 지 몇 년이 흘렀지만,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몰라 마주쳐도 제대로 된 인사 한번 못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습이지만 예전의 정겨운 모습을 보니 분명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시대임에 새삼 부러워진다.

생각해 보면 나의 어릴 적에도 충분한 정을 가지고 살아갔던 것 같다. 학교가 끝나고 놀이터에서 혼자 놀고 있으면 모르는 누군가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건네고 원래 알고 있던 친구처럼 지냈다. 또한 스마트폰이 보편화되기 이전에는 친구의 집 전화번호를 외워 전화를 걸면 누가 받을까 두근거리고 친구의 부모님이 받더라도 어색함 없이 대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개인에게 바로 연락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가족끼리도 번호를 잘 외우지 않는 등 이전만큼 정을 느끼긴 어렵다. 최근에는 새로 이사하면 주위 이웃에게 돌리는 이른바 ‘이사 떡’ 문화도 사라진 지 오래다.

우리는 아주 예전부터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을 깊이 새기며 살아왔다. 속담만 해도 그러하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 콩 한 쪽도 나눠 먹는다.” 이는 선조부터 전해져왔던 타인에 대한 ‘정’을 잘 드러낸다.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그 사람에게 해를 가하기보다 ‘떡’을 하나라도 더 주는 베푸는 마음을 가지며, 한 사람이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콩 한 쪽이라도 나누는 온정을 가지고 살아온 것이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바로 ‘까치밥’이다. 까치밥은 늦가을 잘 익은 감들을 전부 따지 않고 겨울에 까치들을 위해 일부 남겨두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추운 겨울 먹이를 찾지 못하는 작은 날짐승에게조차 최소한의 인정을 베푸는 지혜가 담겨있다. 송수권 시인의 '까치밥'이라는 시를 보면 “고향이 고향인 줄도 모르면서 긴 장대 휘둘러 까치밥 따는 서울 조카아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중략)… 눈 속에 익은 까치밥 몇 개가 겨울 하늘에 떠서 아직도 너희들이 가야 할 머나먼 길 이렇게 등 따숩게 비춰 주고 있지 않으냐”에서 알 수 있듯이 까치밥을 따는 아이를 나무라며 마음을 담은 까치밥이 결국 먼 길을 가야 하는 후손들에게 따듯한 등불이 돼 줄 것임을 강조한다. 이는 우리가 가져야 할 ‘정’의 중요성을 잘 드러낸다.

지난 학기 수업 시간에서 ‘환대’의 개념을 배웠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환대를 ‘조건적 환대’와 ‘무조건적 환대’로 구분하여 ‘진정한 환대’란 타자의 조건을 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무조건적 환대’임을 주장하였다. 처음 이 개념을 배웠을 때는 반발심이 들었다. 나 혼자 살아가기에도 벅찬 세상에 자신의 자유와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면서까지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타자로서의 이웃을 환대해야 한다. 나 하나 잘한다고 사회가 올바르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며, 사람은 사람과의 상호작용과 소통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자의 이익만 생각하며 계산적으로 살아가기보다 문득 주변을 살펴 우리의 이웃을 보살펴야 한다.

코로나19 이후 사회는 더욱 개인주의적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 간다. 예전보다 아파트에서 물리적으로 가깝게 살아가지만, 건물이 높아질수록 켜켜이 쌓인 마음의 벽으로 인해 더 이상 다가가기 망설여지는 사회이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마음 한편에 고이 정을 담아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회의 분위기에 이끌려, 나 하나 살아가기 어렵다는 이유로 깊이 간직하고 있을 뿐, 만일 누군가 먼저 다가간다면 꽁꽁 숨겨두었던 그것을 열어 보일 것이다. 나는 그러한 사회를 꿈꾼다. 사람 사이에 정을 가지고 나누는 삶, 아름답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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