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고립·은둔 청년을 지원합니다.” 요즘 매일 아침 버스에 올라타면 들리는 경쾌한 목소리다. 이 버스에 고립·은둔 청년은 몇이나 탔을까. 비몽사몽인 잠결에도 드는 생각이다.

서울시는 정서적·물리적 고립 상태가 6개월 이상 지속된 경우를 고립 청년, 외출이 거의 없는 생활이 6개월 이상 지속되고 한 달 이내에 직업·구직 활동이 없는 경우를 은둔 청년으로 규정했다.

그들이 말하는 고립·은둔 청년에 해당하는 이는 적어도 그 시간에 출근 버스에 앉아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그 목소리를 듣고, 주변에 있는 고립·은둔 청년을 떠올리고, 그에게 이 소식을 전해주고, 지원 정책에 참여시켜 서울시의 기대효과 달성 사례 한 명을 늘려 주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또한 정서적, 물리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에게 일어나기 쉽지 않은 일이다. 지원하겠다는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지원받아야 할 사람들의 상황을 헤아리지 않을 수 있나.

서울시의 조사 결과, 서울시 거주 청년 중 고립·은둔 청년은 약 4.5%로, 서울시 청년 인구에 적용했을 때 약 13만 명으로 추산된다. 여름 방학부터 계속해 오던 취재를 위해 한국은둔형외톨이지원연대 대표님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이마저도 추산이기 때문에 포함되지 못한 청년들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천천히 고립·은둔 청년을 만나보면서 느낀 바로는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빠른 문제 해결을 위한 상담, 교육, 취업 지원과 같은 대책들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보단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공간과 사람, 그리고 오랜 시간이 걸린대도 기다려 줄 마음이 필요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 역시도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한 달간 나름대로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문제와는 관련 없는 타인’의 위치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을 조금만 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씩 방에서 나오지 못하던 사람을 하루아침에 꺼내어 말하고, 공부하게 하는 것은 걸음마도 못뗀 아이를 달리기 대회에 나가게 하는 것과 같다. 대표님이 전해주신 말 중에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또 이용당했다.” 한 고립·은둔 청년이 정책 지원을 받다가 갑작스럽게 종료되자 그에게 했던 말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성과로 여겨질 수 있지만 당사자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버거운 달리기는 아이를 성장시키지도 못할뿐더러 상처를 남긴다.

방에서 나오지 않는 청년들을 낙오자로 명명하고, 게으른 탓이라며 혀를 차던 과거에 비하면 다른 세상이 찾아온 것이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것은 그 누구도 이들에게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원 정책을 만들고 시행한다는 이들조차 대상자가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고, 알려고 하지 않는데 다른 이들은 오죽하겠는가. 여기에는 자신은 절대 그런 상황에 놓이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이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학보에서 9개월째 취재를 하며 많은 간절한 사람들을 만났다. 차별받는 장애인 교원, 간호사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간호대학 학생들, 집 앞 오랜 쉼터를 잃을 위기에 처한 사람들,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 이들이 부딪히는 벽들도 그런 믿음으로 이뤄져 있었다.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이라는 생각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내재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화는 쉽게 이뤄진다.

하지만 누구나 고립·은둔 청년이 될 수 있다. 어느 순간 치열한 경쟁에 온 힘이 방전돼 일어날 힘을 잃어버릴 수 있다. 비장애인도 살아가며 장애를 갖게 될 수 있고, 누구나 열악한 근무 환경에 처할 수 있다. 한순간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처할 수 있고, 누구나 소중한 사람을 예상치 못하게 잃을 수 있다. 장애인 명예시장 이주현씨를 만났을 때 그는 내게 “누구나 나이가 들면 불편한 곳이 생기고 장애가 생길 텐데, 그때마다 그 모든 사람을 안 좋게만 볼 것이냐”고 물었다. 물론, 내가 겪을 수도 있는 일이라 생각 할 때에야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 옳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겪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들의 존재를 지우는 것보단 확실히 낫다.

내 인생 살아내기도 척박한 경쟁 사회에서 타인의 삶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그 모든 걸 내 일처럼 여기는 것은 무척 피곤한 일이다. 어쩌면 불필요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살 만한 세상은 사람들이 공감으로 연결될 수 있는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도 피곤하게, 공감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나의 글을 읽는 이들이 타인의 일을 우리 모두의 일로 느낄 수 있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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