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년이던 작년 일년을 나는 베를린에서 보냇다.

독일 통일 후의 첫 장기체류를 새 수도인 베를린에서 지내고 싶엇던 소원을 리룬 셈이다.

“나도 베를린에 트렁크를 하나 두고 있단다”라는 유행가도 있다시피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의 연고지였던 베를린엔 일년이턱도 없이 짧을 만큼 수많은 크고 작은 박물관과 유적들, 그리고 문화행사들이 많았다.

모든 면에서 철저한 독일체선 작년의 하인리히하이네 탄생 200주년에 이어, 올해의 브레히트 탄생 100주년, 그리고 내년으로 다가온 괴테 탄생 250주년 기념 행사 준비로 온 나라와 매스컴에서 나는 이들에 대해 하루에도 수도 없이 보고 듣고 읽어야 했다.

특히 베를린은 브레히트가 망명 후 귀국해서 활동한 도시로 곳곳에 그의 흔적들이 숨쉬고 있다.

그의 극장인 ‘베를리너 앙상블’, 그가 살던 집, 그리고 그에 연이어 잇는 공동묘지, 그는 그가 존경하던 헤겔의 맞은 편에 묻혀 있었다.

아마 베를톨트 브레히트만큼 20세기 세계역사와 독일 분단의 역사를 온몸으로 체험한 작가도 아마 드물 것이다.

일차대전을 겪었으며, 이미 스무살의 나이에 금세기 최고의 시를 남긴 그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1933년 긴 망명길에 오른다.

그러나 스위스,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소련 등을 거쳐 미국에 간 그는 미국의 매키시 시절 공산주의자로 몰려 위협을 느끼자 47년 다시 유럽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동독은 그가 생각한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하고 있는 국가가 아니었다.

그때부터 그와 동독정부의 껄끄러운 관계는 지속된다.

그가 연출가이자 극작가로서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편 것은 죽기 몇 년에 불과하다.

그는 1956년 환갑의 나이도 되기 전 타계한다.

그의 생애는 문학과 예술의 존내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그를 탄압하던 히틀러도, 매카시도, 동독도 이제 역사의 명예롭지 않은 한 장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살아남아, 이 먼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까지 그 뿌리를깊이 내리고있다.

이대 독문과에서까지 그의 교육극을 올리게 될 줄은 상상력이 풍부한 이 천재 작가도 예견하지 못했으리라. 지난 9월 브레히트 학회 주관으로 열린 행사에 초대된 한국의 대표적인 영하감독 및 연출가들은 한결같이 그들이 받은 브레히트의 영향에 대해 생생한 보고를 해 주었다.

심지어 한 티브이 드라마 연출가는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효과를 도입할 때는 늘 성공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는 시청률 경쟁에서 실패했다고 말한다.

요즘 유럽에서는 제3의 길을 내세우며 다음 세기가 다시 유럽의 세기가 되리라는 확신에 찬 움직임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유럽의 문화사 및 정신사적 특징은 자기드르이 원천이 과거에 대한 강한 동경이 새로운 미래를 구성하는 힘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8세기 말경 카알 대제가 세운, 온 유럽이 하나였던 시기는 유럽인들의 동경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그 천년 후 독일 낭만주의작가들은 다시 한번 중세의 도래를 꿈꾸었다.

그리고 다시 이백년이 지난 지금그들은우선 유럽단일통화(유러머니)를 시작으로 이 꿈의 실현에 한 발 다가서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동아시아가 세계를 석권하리라는 희망에 찼었다.

아이엠에프로 갑자기 찬물 세례를 받을 때까지.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좀 더 다양한 시각으로 이 기회에 우리가 은연중 세계화를 미국화로 착각하고 살아오지 않았나 자문해 봄직도 하다.

실제로 작은 나라인 우리에게 더 맞는 다양한 정치,경제, 문화, 환경 등에 대한 정책을 배울 수 있는 것은 역시 작은 나라들이 모여있는 구대률인데도 말이다.

물론 문화와 경제 시장으로서도 유럽은 막대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유러머니로 시작되는 유럽의 공세를 위협으로 느낄 것인가 새로운 도전으로 받아들일까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있다.

그러나 어떻게 느끼든 그에 대처하는 길은 하나 뿐이다.

그들을 묶어주고 있는 이천년의 역사와 무노하적 공감대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를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 무대에서는 서로에 대해 충분히 알때만 대화가 가능하며, 대화할 수 있을 때만 참된 동반자, 그리고 또한 대등한 경쟁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가 유럽의 사상과 문화에 있어 많은 존재감을 차지하고 있는 브레히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가치있는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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