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를 대중매체의 시대라고 하다.

신문 잡지로부터 라디오를 거쳐 바야흐로 텔레비젼의 시대에 와 있다.

대중매체가 발달해 가는 과정에서 본다면 독서는 어쩌면 시대에 뒤떨어진 좀 따분한 문화 행태에 속할지도 모르겠다.

단지 눈으로 읽기만 하는 독서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텔레비젼이야말로 훨씬 생동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중매체를 다시 한번 되짚어 생각해 보자. 대중매체가 발달하면 발달할 수록 우리들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한편의 소설을 읽는다고 하자. 배경이나 주인공의 모습을 우리들은 각기 다른 상상 속에서 상황에 맞게 그려본다.

라디오에서 그 소설을 재현한다면 적어도 목소리만은 탤런터의 목소리로 고착된다.

텔레비젼에서라면 상상의 폭은 그만큼 줄어든다.

탤런트의 모습과 행위, 그리고 목소리로 고착되기 때무니다.

그러니까 연출가와 탤런트가 우리들의 몫을 대신해 준셈이다.

대중매체가 발달하면 할수록 우리들의 상상력은 이처럼 퇴화해 갈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고등학교 독서 과목이 있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런 교과서를 보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제대로 학습하는 학교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독서 교과서로는 아예 집에서 낮잠을 자기가 일쑤다.

대학 입시에 별로 도움이 안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독서의 능력이 대학 입시에 평가 될 수 없다면 대체 무엇을 평가하고 있단 말인가. 대학 입시의 개혁을 소리높여 외쳐대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단답형 지식 위주의 육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대학들은 몇년 전부터 다투어 논술 시험을 부과하고 있다.

소기의 목적을 거두었는지 어째든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문에 도한 적지 않은 부작용도 생기는것 같다.

대학 입시에 논술이 출제되니까 너도 나도 논술 바람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열성있는 학부형들은 초등학교 대부터 논술교육을 시켜 달라고 학원에 보내는 일이 있다.

어릴대부터 논술 문제로 굳어버린다면 대체 학생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논술문제는 어른이 읽어도 딱딱하고 재미가 없는 문체라고 할 수 있다.

정감을 제거한 논리적 추론의 글이 재미 있을리는 없다.

재미없는 글을 억지로 자구 쓰게하며, 글쓰기 자체에 취미를 잃고 아예 글쓰기를 포기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우리 국민들은 좋은 학교에 가기 위하여 자산과 능력의 대부분을 소모하는것 같다.

학생은 학생대로, 학부형은 학부형대로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다.

좋은 교육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학교의 간판을 따기 위해서 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학교란 무엇인가? 독서 할 수 있는 능력을 도와주는 기관이다.

교사란 무엇인가? 학생이 자립해서 독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독서는 평생 해야 하지만, 학교는 일정한 기간이 끝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공부 잘하는 학생을 아주 좋아한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지적 임기응변이 좋다는 뜻이다.

출제자의 의도를 재빨리 파악하고 그 의도에 맞는 답을 하는 학생이 공부 잘하는 학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공부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심원한 사상의 체계를 구축하거나 놀라운 감동의 세계를 펼쳐보이는 것은 단답형의 재치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문화적 자산인 동서고금의 고전을 읽는데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일상을 준비하는 것과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미래를 갖는다는 것은 문화를 가진다는 말이다.

일상은 편리하고 안락함을 위주로 하지만 미래는 영속하는 가치를 위주로 한다.

당장의 필요를 위해서 읽는 책과 먼 미래를 위해서 읽는 책은 분명히 다르다.

시험을 위해서 읽는 책을 나는 독서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당장의 필요를 위해 읽는 책이기 때문이다.

독서는 아름다운 문화를 창조하기 위해서 자원을 개발하는 행위이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석학들에게 지혜를 빌리는 행위이다.

김상태 교수(국어국문학과)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