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은 늘 이런 식이다. 스쳐 지난 이별의 길이를 재면 아마 이 지구 한 바퀴는 거뜬히 돌 텐데 매번 왜 이렇게 낯선지 모를 일이다. 지난밤, 대동제 덕에 쌓인 업무를 끝내고 새벽 1시가 돼서야 택시를 탔다. 다리도 건넜고 이제 집까지는 10분도 채 남지 않았는데 왈칵 눈물이 났다. 어느새 인사를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일까. 차창 사이로 부는 바람에 멋대로 울어버리는 꼴이 2000년대 영화의 바보 같은 주인공처럼 촌스러웠다. 책상 위에 어질러진 카메라, 볼펜, 지난주 발행한 학보. 고개 돌리면 보이는 익숙한 얼굴들까지. 굴러다니는 먼지마저 정든 이곳에 어떤 인사를 건네야 할까.

20살 나의 첫 직장은 모 백화점에 입점한 수제화 브랜드였다. 비록 주말 풀타임 아르바이트였지만, 꽤 열심히 해서 곧잘 칭찬받곤 했다. 매장이 협소한 탓에 매니저님과 단둘만 근무하는 날이 많아 매니저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때 매니저님이 무심코 해주신 말이 이따금 뇌를 찌른다. “성빈아. 이 세상은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아. 그것만 알아도 상처가 반으로 줄어.” 처음에는 어리다고 무시하나 싶어 꼰대의 무례한 말이라며 잊어버리려 했지만, 종종 생각났다. 믿었던 교수님이 B-을 줬을 때, 노력이 보답하지 않는 재능의 한계를 느낄 때, 관계의 그네가 기울어 놀이의 끝이 보일 때.

어렸을 때는 하루가 돌림노래였다. 매일 엄마의 잔소리에 잠을 깨고 학교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맞추지 않아도 같이 밥을 먹고, 같은 수업을 듣고, 친구와의 통화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 모든 게 너무 일상이라, 어른이 돼도 영원할 거라 착각했다. 막상 대학에 오니, 친구랑 밥 한 끼 먹는 것도 다 노력이 필요했다. 왜 이렇게 멀어지는 기분인 건지. 발 없는 이별이 버거워질 때쯤 스스로 되묻기 시작했다. 내가 문제인 걸까. 연극으로 치면 계속 주연만 하다, 점점 밀려나는 기분이었다. 그때마다 세상 모든 일에 싫증이 났다. 어차피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거 나만 보고, 내 얘기만 하고, 그렇게 몇 년을 내 세상을 꾸밀 수 있는 것만 찾아 헤맸다.

그 시기에는 진심으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보다 가식이라도 떨고 척이라도 하며 사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거짓을 덧입는 부작용으로 매일 밤 이불킥과 함께 내장에 경련이 일었다. 아 그때 이 말은 하지 말걸, 그런 행동은 하지 말걸. 잘 알지도 못하는 일에 대해 아는 척을 하고, 겨우 얼굴밖에 모르는 사람을 흉보며 이름만 아는 사람을 시기하기도 했다. 앞에서는 성숙한 어른인 척 행세했지만, 실상은 관심이 없어 쿨할 수 있는 나밖에 모르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그리 쌓는 하루가 물거품보다 빠르게, 모래성보다 흔적 없이 사라진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마지막으로 취미를 찾고자 만든 동아리마저 망하고 어쩌다 들어온 학보에 도착해서야 내가 살던 세상이 개구리 우물보다도 좁다는 것에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각자의 세계를 가진 이들이 서로의 세상에 넘나들며 사는 현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카메라를 들며 다양한 세상을 마주하게 됐다. 자신의 10년보다 지구의 100년을 걱정하는 사람부터 버려진 식물을 모아 나눔을 실천하며 공존을 꿈꾸는 사람, 매일매일을 성실하게 공부하며 3년 만에 원하던 시험에 합격한 사람까지. 기자가 아니었다면 무심히 가던 길 갔겠지만, 이상하게 손에 카메라만 쥐면 렌즈에 걸린 이들에 홀렸다. 낯설지만 아름다운 모든 이들을 사랑하게 됐다. 어울리지 않지만, 얼결에 달은 부장이라는 직함은 나를 더 채찍질했다. 덕분에 마하의 속도로 달리는 일주일에 이상한 잡념은 생각할 겨를도 없어졌다. 물론 후회는 남는다. 더 잘하고 싶었는데, 악으로 깡으로 노력했지만 어설픔을 숨기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런 모자란 부장을 도와주는 꼼꼼한 동료들의 응원과 애정 덕에 우리는 함께 앞에 놓인 수많은 언덕을 기며 뛰며 올라갈 수 있었다. 그 또한, 축복이었다.

이화의 모든 질문과 답이 모이는 곳에서 나는 내 답을 찾았다.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어도 내 인생의 주연은 죽을 때까지 나다. 동시에 내 연극에 등장하는 모든 조연이 각자의 세계에서 누구보다 중요한 주인공이기에, 우리는 이별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좋은 동료들과 함께 많은 인연을 만나며 미련없는 한 페이지를 썼다.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배웠고, 세상에 참견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됐다. 그렇게 조금은 성장했다고 믿고 싶다. 섭섭하지만, 매미가 목청이 터지라 우는 여름이 오면 또 다른 누군가와 새로운 페이지를 넘기고 있을 것이다. 이제 인연의 올이 다 풀렸더라도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언젠가 다시 마주하고 싶다. 나의 카메라가 스친 모든 이를 기억하며, 오늘도 그들의 세계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의 인생에서 밉지만은 않은 엑스트라, 별안간 보고 싶은 조연이길 바라며, 나답게 손을 흔들고 싶다. “Long Live And Pros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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