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겨울, 나는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의 잔디밭에 앉아있었다. 감사하게도 해외취재 프로그램에 선발돼 덴마크에 다녀왔다. 덴마크에 간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은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디자인학도가 아닌 모습으로. 8년 전에는 내가 당연히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디자인의 나라를 찾는다면 아마도 그 공부를 하기 위해서일 거라고 상상했다. 기자를 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나는 기자였다. 

취재하러 간 곳에서는 저녁 식사에 초대받아 10명 넘는 덴마크 청년들과 감자수프를 먹었다. 이 또한 상상 못 한 일이다. ‘어쩌다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지’라는 의문이 생길 때마다 난 과거로 돌아간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기에 참고할 수 있는 건 과거뿐이다. 무엇이 나의 지금을 만들었는지는 이전 선택들만이 답해줄 수 있다. 덴마크에서 잔디밭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봤다. 취재가 끝나고 주어진 잠시의 자유 시간 동안 무엇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는지 고민했다. 

학창 시절에 그렸던 미래는 지금과 같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디자인을 하고 싶었고 언젠간 시각디자이너가 돼 있을 거라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원하던 대로 책이나 앨범을 디자인하고 있으리라 예상했다. 미래는 한 치 앞도 모르는데 그땐 그리 생각했다. 계획한 대로 인생이 흘러가리라 여겼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입시에 미끄러지고 재수했다. 다른 길은 생각해 본 적 없어서 공허한 스무살을 보냈다. 책장에 꽂혀있는 디자인 서적들을 볼 때마다 눈물을 참았다. 

대신 재수할 때는 인문계열 진학을 결정했다. 나의 미래에는 5년 동안의 여정과 며칠 동안의 고민이 공존했다. 책상에 앉아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전공은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4년 동안 공부할 학문을 이런 식으로 정했다는 게 코미디지만 한국에서 나만 이러고 있을 게 아닐 거라는 사실이 위안이 됐다. 지금 돌아보면 오히려 고등학교 때의 나처럼 하고 싶은 게 명확한 학생이 오히려 드물 것이다.

숫자에 유독 약하니까 경제는 빼고, 경영은 관심사가 아니었고, 영문은 셰익스피어를 분석할 자신이 없었다. 세상을 보는 눈을 넓히고 싶었다. 결국 사회학과 정치외교학 두 학과만이 남았다. 그런데 후자에 원서를 넣은 이유는 당시 정외과의 정원이 사회학과보다 단 두 명 많았기 때문이다. 모든 입시생이 그렇듯이 합격할 확률을 높이는 것이 우선이다. 내가 저 두 명에 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지금의 전공을 선택했다. 거짓말 같지만 인생의 중대한 결정들은 때때로 이렇게 결정된다. 

이화에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디자인학부와 정치외교학과 두 장의 원서를 냈지만 지금의 결과가 말해주듯이 정치외교학과에 합격했다. 찰나의 고민 끝에 결정한 학과지만 전공 공부는 적성에 맞았다. 대학에 오기 전까지는 잘 알지 못하던 분야였으나 수업을 듣는 것도, 친구들도 좋았다.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 생각했던 나는 대학 생활과 공부에 모두 익숙해져갔다. 

그러다 작년 이맘때 학보를 만났다. ECC의 둥근 테이블에서 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데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에 자꾸 눈이 갔다. ‘한번 해볼까’하는 마음에 시작했다. 단지 글 쓰는 실력을 늘리고 싶었다. 그땐 기사 하나를 작성하는데 이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과 들어가는지 몰랐다. 하다 보니 학보가 일상이 됐고 가장 많은 애정을 쏟게 됐다. 그러다 부장기자를 맡고, 감사하게도 해외취재 프로그램에 선발되고, 유럽에 갔다. 

이게 내가 덴마크에 가게된 이유다. 디자인을 놓아주고, 이화에 입학하고, 운명처럼 학보를 만났다. 근 몇 년간 내 인생은 ‘어쩌다’의 연속이었다. 장기적인 계획은 마음대로 된 게 하나 없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내가 내렸던 모든 결정이 나를 여기로 이끌었다. 각각의 선택은 모두 개별적인 일 같았지만 이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줬다. 

이 모든 과정에서 나의 의지가 없었다고 말할 순 없다. 그저 그때그때 내 마음이 시켰던 대로 갔다. 좋든 싫든 경험들은 나름의 교훈을 남겼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달리는 것도 좋지만 그 목표에 매몰되면 오히려 다양한 길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굳이 힘들게 먼 미래를 그리지 않고 내 눈 앞에 놓인 일들을 충실히 해나가는 것도 의미 있다는 걸 배웠다. 

열아홉의 내가 지금의 날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나는 그때의 내가 계획했던 그 어떤 것도 이루지 못했다. 만약 원했던 대로 디자인학부에 진학했더라면 더 행복했을까? 그러나 가보지 않았기에 알 수 없다. 어쩌면 더 행복했을지도, 아니면 조금 더 힘들었을지도. 하지만 나는 아쉽지 않다. 이젠 알기 때문이다. 나의 매일에 충실하다 보면 또 어딘가에 도착해있을 것이다. 그리고 난 나름대로 행복할 것이다. 오늘도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은 흘러가는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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