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종국 사학과 교수
남종국 사학과 교수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프랑스 파리 제1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4년부터 본교에 재직하면서 중세 지중해 문명 교류의 역사, 중세 이탈리아 상인들, 자본주의의 형성, 몽골 시대 동서 교류사, 중세 기독교 순례, 이자 대부의 역사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Le commerce du cotonen Mediterranee a la fin du Moyen Age』(2007), 『중세 지중해 교역은 유럽을 어떻게 바꾸었을까』(2011), 『이탈리아 상인의 위대한 도전』(2015), 『중세 해상제국 베네치아』(2020), 『중세를 오해하는 현대인에게』(2021), 『천년의 바다: 중세 지중해 교류사』(2022)가 있고, 2권의 번역서와 다수의 공저가 있다.

이미지와 영상이 대세인 시대다. 번거롭게 종이신문이나 책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동영상일지라도 10분을 넘기면 곧바로 화면을 닫는다. 이처럼 짧고 빠른 속도전의 시대에 긴 호흡의 독서는 점점 더 외면받고 있다. 이런 시대에 독서하라고 권하는 것이 구태의연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때론 책은 세상을 변화시키기도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책 속에 담긴 사상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스티븐 그린블랫(Stephen Greenblatt 1943-)은 저서 ‘1417년, 근대의 탄생’에서 책 한 권이 근대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이야기는 1417년에서 시작된다. 르네상스 시기 인문주의자였고 교황청 서기로도 일했던 이탈리아 출신의 ‘책 사냥꾼’ 포조 브라촐리니(Poggio Braccionili 1380-1459)는 1417년 독일의 한 수도원에서 오래된 고서 한 권을 찾아낸다. 책은 기원전 1세기 로마 작가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이다. 그는 이 책을 피렌체로 가져와 필사했고, 여러 사람이 이 책을 읽었다. 그린블랫은 이 책에 나오는 사상이 이후 세상을 바꾸는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어떤 생각이 세계사의 흐름에 영향을 줄 정도로 혁신적이었을까? 답은 루크레티우스의 저서 서문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의 삶이 무거운 종교에 눌려/ 모두의 눈앞에서 땅에 비천하게 누워 있을 때/ 그 종교는 하늘의 영역으로부터 머리를 보이며/ 소름끼치는 모습으로 인간들의 위에 서 있었는데/ 처음으로 한 희랍인이 필멸의 눈을 감히 맞서 들었고/ 처음으로 감히 맞서 대항하였도다.”

조금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서양 중세는 종교가 모든 일상을 지배하는 시대였다. 근대의 탄생은 무거운 종교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과정이었음을 고려할 때 이 책이 근대 탄생에 일조했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서문에 나오는 한 희랍인은 에피쿠로스이다. 루크레티우스는 기원전 4세기 아테네에서 활동했던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생각에 공감해, 이를 찬양하고 설명하는 시를 썼다. 에피쿠로스의 사상 중 세상을 바꿀 정도의 파괴력을 가졌던 것은 사물 본성의 핵심인 원자론이었다. “지금껏 존재해 온 모든 것과 이후 존재할 모든 것은 파괴할 수 없는 입자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것은 더는 작아질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이었다.” 이 원자의 정해지지 않은 불규칙한 운동, 즉 일탈로 사물이 태어나며, 이 일탈은 자유의지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생각은 기독교 교리에 위배되는 불온한 사상이었다. 그런 연유로 동시대의 피렌체 수도사들은 터무니없는 주장일 뿐이라고 조롱했고, 학교에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읽는 것을 금했다. 무엇이 무서워서 이를 금지했을까? 궁금하면 ‘1417년, 근대의 탄생’을 읽어보자.

이 책의 매력이자 장점은 연쇄 독서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우선 책의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읽고 싶은 욕구를 억누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읽고 세계관이 변했다고 이야기한, 16세기 도미니쿠스 수도사였던 조르다노 브루노의 사상에 대해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브루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닌 것처럼, 태양도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복수의 세계가 존재하며, 복수의 세계에서도 만물의 씨앗인 원자들의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사물이 생성, 파괴, 재생한다는 혁신적인 사고를 했다. 이 불순한 생각을 가졌던 수도사는 종교재판에서 이단으로 판명돼 1600년 2월 로마의 캄포 데이 피오리(Campo dei Fiori) 광장에서 산 채로 불태워졌다. 그를 불태운 16~17세기 종교 전쟁 시대의 불관용과 광기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 밖에도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던 셰익스피어, ‘유토피아’의 저자 모어, ‘수상록’의 저자 몽테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의 저자 뉴턴, 미국 독립선언서에 행복 추구권을 넣게 만든 제퍼슨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진다. 이런 연유로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1417년, 근대의 탄생’을 필독서로 추천한다. 꼼꼼하게 읽는다면 서양 사상의 큰 흐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이 고대 로마의 작가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으로 이어지고, 르네상스 시대 포조, 브루노 등의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재발견되어 근대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처럼, 책은 세상을 변화시킬 잠재력이 있다. 독서는 그 시작점이다.

남종국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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